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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울 게 없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

중앙선데이 2011.04.24 01:12 215호 2면 지면보기
아주 오래된, 개인적인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 벌써 30년이나 흘렀다.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금세 운동권 학생이 됐다. 한데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주 ‘범생이’였다. 청소년의 혈기에 껄렁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주먹질 같은 것도 했지만 사상적으로는 매우 순응적인 학생이었다. 얼마나 순응적이었느냐 하면 ‘한국적 민주주의와 유신헌법의 정당성’ 같은 글을 써서 백일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신문사 기자인 내 고교 동창은 지금도 그걸 빈정댄다. 유신헌법 찬양하는 글을 쓴 놈이라고. 당시 중·고교에선 한국에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고 유신헌법이 옳다고 가르쳤다. 나는 그대로 믿었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대학에 들어와 당시 필독서인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을 때 현기증이 났다. 그 책이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바보야, 너는 지금까지 속아 살아왔어.” 분노감에 호흡이 가빠졌다. 그 다음부턴 시위 때마다 빠지지 않았다. 이제 긴 세월이 흘렀고, 세상 경험을 적잖이 한 상태에서 돌이켜 보면 그 책에 나온 주장들 상당수는 엉터리였다. 외채 때문에 머잖아 망한다던 대한민국은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 분단의 책임은 이승만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민족경제론이라는 것도 학문적 바탕은 빈약한, 감정적 주장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에는 그런 걸 알 도리가 없었다. 그냥 독재자에게 속았다는 분함만 가득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이번에 한국사를 고교 필수과목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백번 잘한 일이다. 세계화 시대여서 국사는 선택과목이면 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따라 없어진 지 16년 만이다. 사실은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제 나라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항의하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도 코웃음 치고, 프랑스한테 빼앗긴 외규장각 문서도 되돌려 달라고 따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가 받았던 충격을 상기하며 몇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무엇보다 진실에 근거해 가르쳐야 한다. 좌파 성향의 교사들에 의해 확산된 자학적(自虐的)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 분명하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 중에서 대한민국만큼 성공한 나라는 없다.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무조건 다 훌륭했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도 옳지 않다. 부끄러운 과거도 있는 그대로 알려 줘야 한다.

예를 들면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독재자로만 몰아붙이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공로만 앞세울 수도 없다.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경제 성장을 이룬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되 그에게 탄압받았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저 담담하고 냉정하게 밝히면 된다. 이건 좀 다른 차원이지만 북한의 김일성에 대해서도 알려 줘야 한다. 남북 간의 정당성 경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북한을 동경하는 건 극소수의 주체사상 맹신자들밖에 없다. 그러니 김일성이 했다는 항일무장투쟁의 실체가 뭔지, 북한이 그토록 자랑하는 보천보전투라는 게 뭔지도 거리낌 없이 있는 대로 말해 주면 된다. 이건 일종의 백신을 맞는 것이다. 동시에 북한을 대한민국의 역사 속으로 끌어들여 녹여내는 것이다.

핵심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친일 문제다. 친일파들을 잘 연구해야 한다. 손가락질하고 혼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는 그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부패한 양반과 무능한 왕조를 바닥에서 떠받쳤던 조선 말엽의 노비는 일본이 조선왕조를 무너뜨렸을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신분이 해방된 걸 기뻐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친일에 앞장선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다. 일본이 한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상은 용서받기 힘들지만 우리 스스로 따져 보고 연구하고 반성해야 할 대목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역사교육의 부활을 축하한다. 그런데 그동안 우파적 억지와 좌파적 왜곡 모두를 골고루 경험했으니 이젠 제대로 살아났으면 좋겠다. 중국 같은 초강대국의 코 아래서 수천 년 동안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게 한민족이다. 우린 부끄러워할 일보다 자랑할 게 훨씬 많다. 당당하게,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가르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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