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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 진압할 재주지만 용모가 풍만하지 않아”

중앙선데이 2011.04.24 00:57 215호 6면 지면보기
“말과 논리와 전술과 지모가 난리를 진압할 만한 재주이나 용모가 풍만하고 두텁지 못하며 관상도 입술이 말려 올라간 듯 뒤집혀 복장은 아니라 여겼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합격한 동기생 고상안(高尙顔)이 충무공을 묘사한 문장이다(사진). 삼가현감이던 그는 한산대첩 2년 뒤인 1594년 3월 수군 선발 시험감독관으로 한산도에서 반달을 머물며 장군을 만난다. 그는 나중에 『태촌집』이란 문집에 묘사를 남겼다.

무과 동기생 고상안이 기록한 이순신

원균ㆍ이억기에겐 꽤나 비판적인데 구사직은 후하게 점수를 줬다. 그런데 동갑에 동기인 충무공에 대해선 평가가 애매하다. 영웅적인 면을 평가하면서도 용모는 ‘웅혼한 기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썼다. 그렇다고 일부러 용모를 깎아내린 것 같진 않다. 그는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죽은 통제사가 산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을 쫓아냈다’고 극찬한다. 원문을 해석한 동양대 강구율 교수는 “객관적인 글”이라고 평가했다. 이 기록이 장군의 얼굴을 묘사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구국의 영웅’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공의 친구인 류성룡이 자신의 글 『징비록』에 남긴 “얼굴이 단아하여 수양 근신하는 선비 같다(容貌雅飭. 如修謹之士)”란 기록이다. 그런데 이는 선비를 묘사하는 상투적 표현으로 간주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수준은 높다는 평가를 받고 큰 공을 세운 공신의 영정은 공식적으로 그렸음에도 장군 생전 초상이 없는 것은 미스터리다.

충무공 영정은 수십 가지라는 말까지 있다. 그림은 뚜렷한 두 흐름을 보여 준다.
1619년에 그린 상감행실도에는 전사한 이순신이 배에 누워 있는 그림이 있는데 아쉽게도 인물화가 아니다. 19세기 것으로 몽골 장수를 닮은 충무공 모습의 그림(동아대 박물관 소장)이 있다. 『삼국지』의 장비를 닮은 일본 판화 그림(1854년)도 있다. 20세기 들어와 18, 25, 29, 33년 영정이 꾸준히 양상됐다. 이때까지 이순신은 전형적인 무골로 그려졌다. 전립을 쓰고 눈매가 날카롭고 얼굴이 길면서 각진 턱, 팔자수염 등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얼굴이 선비처럼 고와졌다. 복장도 무인의 전립 대신 사모관대 차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49년, 51년 등에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 김은호가 사모관대나 갑옷차림의 영정을 그렸지만 여전히 얼굴은 고왔다.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장군의 영정은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52~53년 그렸다. 가로 113㎝세로 193㎝인 대형 영정이다. 73년4월 28일 박 전 대통령은 “여러 개 있는 충무공의 영정을 하나로 통일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0월 당시 문화공보부는 장 화백(월전)이 그린 충무공 영정을 첫 표준 영정으로 지정했다. 그 뒤 충무공은 수척하며 곱고 고민하는 얼굴의 장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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