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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뚫리는 드라이버 소리, 볼 수 없어도 칠 수는 있죠”

중앙선데이 2011.04.24 00:23 215호 20면 지면보기
혜광학교 원희승(가운데)군이 박홍길 교사의 지도로 어드레스 자세를 익히고 있다. 인천=최정동 기자
골프는 참 묘한 운동이다. 하다가 어려우면 흥미를 잃게 마련인데 골프는 반대로 힘들수록 매력에 빠진다. 시각장애인들은 어떨까. 비장애인들도 어려워하는 골프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21일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시각장애 특수학교인 혜광학교를 찾았다. 교무실 입구의 ‘나는 할 수 있다’라는 푯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혜광학교의 구호다. 체육시간을 맞아 옥상에서 골프 수업이 한창이었다. 전맹(全盲)과 저시력 학생 7명이 골프채와 씨름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배우는 학생들은 그립을 잡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전맹 학생들은 클럽 헤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골프 코치를 맡고 있는 박홍길(40) 체육교사의 레슨이 시작됐다. “클럽을 자신의 앞에 놓았을 때 샤프트가 내 몸쪽으로 오면 클럽 헤드가 목표물을 향하고 있는 거야.”

시각장애 혜광학교 아이들의 ‘귀로 하는 골프’


골프를 배워본 학생들은 어느 정도 익숙한 듯 클럽을 자신 있게 휘둘렀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클럽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골프공은 고무 티 위에서 꼼짝도 안 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간신히 클럽과 골프공이 살짝 만났다. 10m 정도밖에 전진하지 않았지만 당사자는 마치 300야드를 날린 듯 즐거워했다. 공을 맞힌 학생은 환호성을 질렀고 처음 클럽을 잡아본 학생들은 부러운 듯 쳐다봤다.

퍼팅 성공했을 때 ‘땡그랑’ 소리 환상적
2년 전 클럽을 처음 잡아본 최승호(17)군은 “골프가 재미는 있는데 너무 어려워요. 처음에는 어깨와 팔이 너무 아파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하지만 공이 클럽에 맞았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 골프를 배우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연습을 마친 뒤 볼을 정리하는 혜광학교 학생들.
다섯 살 때부터 시력이 나빠져 지금은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승호는 가끔 혼자서 연습장을 찾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골프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화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에요. 공이 잘 맞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다시 찾게 돼요.”

미숙아 망막증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을 잃은 원희승(17)군은 골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하지만 희승이는 골프 예찬론자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희승이는 2년 전부터 체육시간에 골프를 배웠다. 자주 TV를 통해 골프 경기를 듣는다는 희승이는 “TV에서 선수들이 드라이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 제 가슴이 다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특히 퍼팅이 성공할 때 나는 ‘땡그랑’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요”라며 웃었다. 희승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도 역시 퍼팅이다. 박홍길 교사는 “시각장애인들은 청각과 촉감이 매우 발달돼 있어 퍼팅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설명했다. 타이거 우즈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불륜 스캔들 이후 싫어졌다는 희승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신지애(23·미래에셋)다.

희승이는 “처음에 골프를 친다고 하니깐 부모님도 친구들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두들 부러워합니다. 시각장애인이 골프를 못 친다는 편견을 깨고 싶고, 언젠가는 필드에서 멋진 샷을 날리고 싶어요”라고 희망을 말했다.

이 학교 학생들이 골프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체육진흥투표권 수탁사업자인 스포츠토토의 도움이 컸다. 스포츠토토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하나인 ‘희망나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8년 이 학교 옥상에 골프 연습장을 만들어 줬다. 희망나눔 프로젝트는 장애인·저소득층·소년소녀가장 등 소외된 이웃에 꼭 필요한 스포츠 시설과 용품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스포츠토토의 김무균 커뮤니케이션 본부장은 “지난해 태풍으로 인해 골프연습장 일부 시설이 망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비장애인 함께하는 스포츠
박 교사는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성과 끈기가 떨어지는 편이다. 최근에는 시각장애와 지적 장애가 동반되는 중증 학생이 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쉽게 포기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이 골프를 배워 증세가 많이 호전됐다”며 “골프는 정지된 공을 치는 스포츠라서 스윙 궤도만 제대로 익히면 시각장애인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졸업 후에도 이곳에서 연습을 원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골프의 또 다른 매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골프는 다른 운동에 비해 부상이 적어서 시작장애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보지 않고도 칠 수 있다(You don’t have to see it, to tee it)’는 미국 시각장애인 골프협회의 슬로건이다. 시각장애인 골프의 공식 명칭은 블라인드 골프(Blind Golf)다.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아 플레이를 한다. 1925년 미국의 클린트 러셀이 고안한 블라인드 골프는 현재 12개국에서 즐기며 국제대회도 열리고 있다. 국내에도 한국 시각장애인 골프협회가 있으며 2008년 조인찬 선수가 호주 시각장애인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올해 설립 55주년을 맞은 혜광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전교생 147명 중 전맹 학생이 40% 정도를 차지한다. 이 학교 출신인 이석주(44) 교감은 “학생들에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스크린골프를 설치해 주고 싶지만 놓을 장소가 없다. 경기도와 인천을 통틀어 시각장애 특수학교는 이곳이 유일하다. 시작장애인 학생들에게도 다양한 스포츠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은 비록 앞은 안 보이지만 짜릿한 손맛을 기억한 채 마음의 눈으로 골프를 즐긴다. 비장애인들도 눈가리개를 하고 함께할 수 있다. 스코어와 거리 욕심으로 잔뜩 힘이 들어간 골퍼라면 블라인드 골프로 마음을 다스려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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