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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양쪽 눈금의 잣대를 항상 챙겨라

중앙일보 2011.04.23 01:30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조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없을 겁니다. 국권을 농락한 간신의 전형에서부터 혼란기 국가의 중심을 지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립니다. 시대에 따라서도 평가가 달라집니다. 아마도 조조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건 송나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시인 소동파의 평가는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평생을 간사함과 거짓으로 살더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진심을 보였다.”



 그 진심이란 조조가 말년 병석에서 틈틈이 써둔 유언집 격인 ‘유령(遺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노회한 정치인은 유언에서 결코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이라 봐야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나는 대체로 군중에서 올바로 법을 집행했지만, 화를 내거나 실수를 한 점들도 있으니 이는 본받을 필요가 없다.” 나머지는 모두 소소한 일상 얘깁니다. “첩과 기생들은 평소 고생했으니 내가 죽더라도 동작대에서 살게 해줘라.” “남은 향은 사람들에게 나눠줘 낭비를 줄여라.” “여자들은 새끼 꼬는 법을 배워야 짚신이라도 팔 수 있을 것이다.”



 한갓 촌부의 유언도 이럴 것 같지 않지요? 후세의 비웃음을 사는 이유입니다. 소동파 역시 마찬가집니다. 살아서 영웅호걸을 자칭하더니 죽음 앞에서는 소인배의 본성을 숨길 수 없었다는 경멸입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 루쉰은 조조를 영웅으로 존경까지 표합니다. 삼국지 강의로 명성을 얻은 이중톈 교수 같은 이도 후한 평을 하지요. “조조가 비록 정의를 위해 죽지는 않았지만 의연하게 죽었으며, 시시콜콜 후사를 배려한 것도 의연함의 표현이다.” 사실 조조는 문장가로도 유명합니다. 그런 사람이 유언집을 남긴다면 나라와 백성 운운하며 좀 더 멋진 말을 하고 싶었을 법도 한데 조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좀스럽고 간사한 부분도 있지만, 정이 많고 진솔한 부분도 틀림없이 있는 거지요.



 이렇기 때문에 인물을 평가하는 잣대는 위쪽은 공(功)의 눈금이, 아래쪽엔 과(過)의 눈금이 있습니다. 양쪽 눈금을 합쳐야만 올바르게 잴 수가 있는 겁니다. 좀 더 재볼까요? 내친김에 대륙으로 죽 달리겠습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세와 부역제도를 개혁해 사회생산력을 크게 높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사대부와 관료들을 질투했습니다. 독재권력을 세우기 위해 2만 명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편 것도 그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따져보면 과실보다 공적이 많습니다.



 청나라 건륭제도 그렇습니다. 그는 국가를 더 강대하게 하고, 국고를 가득 채웠으며, 문화를 발달시켜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간신을 총애하는 바람에 부패가 가속되고 탐관오리가 들끓어 국력 쇠퇴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과실이 공적을 다 가릴 수 없습니다.



 현대 중국의 마오쩌둥도 무에 다르겠습니까. 인민공화국 초기의 경제 발전과 사회주의 개조를 이룩한 탁월한 영도자였지만, 말년에 추진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은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그래도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에게는 7의 공과 3의 과가 있다”는 걸로 과거사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굳이 중국의 경우를 든 건 가까운 예로 삼으면서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을 거론하면 아무래도 보다 논쟁적이 될 테니까요. 그래도 이제 우리 현실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며칠 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과 4·19 혁명 희생자 유족들의 화해가 무산됐습니다. 잘됐으면 좋았겠지만, 어찌 보면 시작부터 어긋난 일이었습니다. 화해란 게 가해자가 손을 내민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직·간접적인 당사자와 소신 있는 관전자가 많은 역사적 화해란 더욱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한편에 나뉘어 서 있을 겁니다. 어느 편에 서건 중요한 건, 눈금이 양쪽에 있는 잣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쪽 눈금으로 독립운동과 국제정세에 대한 냉철한 분석,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쟀다면, 아래쪽 눈금으로는 친일 잔재 미청산, 부패와 부정선거를 재야 합니다. 양쪽을 정확하게 쟀다면 어떻게 해야 화해에 이를 수 있을지 길이 보일 겁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필요 이상의 애정이나 미움이 싹트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이번 일뿐만이 아닙니다. 매사에 양쪽 눈금의 자를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도자를 평가할 때만이 아니라, 내가 지도자가 됐을 때도 필요한 겁니다. 『채근담』 말이 그겁니다. “공로와 과실은 혼동하지 말라. 혼동하면 사람들이 태만한 마음을 품으리라. 은의와 구원은 크게 밝히지 말라. 밝히면 사람들이 배반의 뜻을 일으키리라.”



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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