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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4·19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중앙일보 2011.04.23 00:21 종합 29면 지면보기






조혜자
이승만 전 대통령
며느리




나의 시어머님 프란체스카(1900~92) 여사는 이화장(梨花莊)에서 22년간 모시고 사는 동안 해마다 4·19 무렵이면 가슴앓이를 하셨다. 제일 마음 아픈 계절이었다.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대신 젊은 애들이 맞았다”고 애통해하시던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의 주름살 가득한 슬픈 얼굴과 함께 온갖 가슴 아픈 기억이 어머님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봐야 하는 며느리인 나도 마음이 아팠다.



 4·19 30주년이 되던 1990년 4월 어느 날. 만 90세가 되신 어머님께서 나에게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느냐”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네!” 하고 대답하자 “강석이 묘에 꽃을 좀 갖다 놓아 주면 고맙겠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강석이는 이기붕 전 부통령의 아들이자 이 전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 4·19 때 경무대(景武臺) 36호 관사에서 일가족과 함께 자결했던 청년이다. 강석이 자결하기 전날 어머님 일기엔 “강석이가 저녁 8시에 와서 성경을 함께 읽었다”고 쓰여 있었다.



 어머님은 또 “30년 전 4·19 때 수많은 젊은 학생이 우리 대신 죽고 다치고, 희생을 당했는데 그 귀한 청년들의 묘역에도 꽃을 준비해 바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다가 “그때의 희생과 상처가 너무 크고 깊어 더 많은 세월과 역사가 흐를 때까지 기다려야 될지 모른다. 세월과 역사가 해결해 줄 때까지…. 마음의 꽃을 멀리서 보내도록 하고, 그분들의 영령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도록 우리는 열심히 기도 드리자”고 하셨다. 슬픔으로 눈물이 고이던 주름 잡힌 90세 어머님의 눈이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머님은 한국 여자인 나보다 더 한국적인 분이셨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도우실 때보다 대통령 부인으로 내조하실 때가 정말 힘드셨다고 한다. 또 외국 태생의 한계를 가장 많이 느꼈을 때가 4·19였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나는 하와이에서 너의 남편 인수를 양자로 들이자고 이 대통령께서 주장하실 때 ‘헌 가방 속에 헌 옷밖에 가진 게 없는데 또 식구 한 사람이 더 생기면 어떻게 감당하실 것인가 염치없는 생각’이라고 반대했었는데 아들이 생기고 보니 이렇게 내 노후가 다복하구나!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너무나 큰 짐과 함께 어려운 일들이 많아 너희들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는 어려운 집안에서 돈을 더 아껴 쓰고 남편 보필 잘하라”고 일러 주시던 인자한 모습이 한없이 그립다.



조혜자 이승만 전 대통령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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