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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판결은 소통이다

중앙일보 2011.04.23 00:21 종합 29면 지면보기






정인진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고 한다. 판결을 선고하면 구구한 설명을 보태지 않는다는 말쯤 될 게다. 그러나 보다 진중한 함의를 찾는다면 판결이 판결로서의 자족성을 가지라는 말도 된다. 판결의 결론과 이유가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판결은 소통이다. 사건의 당사자가 목마르게 바라는 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또는 그와 함께 당사자는 소통을 바란다. 내 말 좀 들어보라는 것,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보여달라는 것, 내 말이 틀렸다면 왜 그런지 알아듣게 말해달라는 것, 이게 당사자의 바람이다. 판결은 국민에 대한 권력 행사다. 권력의 행사 방식이 문자행위임은 판결이 가지는 희귀한 특성이다. ‘칼도 지갑도 없는’ 법원의 판결이 승복되기 위해서는 판결이 소통의 결과여야 하며 동시에 소통의 도구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받는 판결들은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판결을 미문(美文)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판결문 문체의 획일성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법관의 자유로운 개성과 창의성을 막는다고 한탄하기에는 법관의 업무량이 살인적으로 많고, 법관의 판단과 양형이 통일되어야 할 필요가 너무나도 절박하다. 판결은 ‘육하원칙으로 추측될 수 없는 진실’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문기사가 왜 미문이 아닌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판결도 다르지 않다.



 판결은 승복할 만한 이유를 담아야 한다. 승복할 수 없는 판결을 받은 당사자에게 달은 보지 않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달이 보이겠는가. 판결은 반드시 소통의 결과여야 하고, 그 자체로 다시 소통을 의도해야 한다.



 사람들은 법원에서의 절차에 답답해한다. 왜 어떤 법관들은 증거신청을 받아주는 데 그리도 인색한가. 왜 어떤 법관들은 당사자들이 써내지 않는다고 나무라기보다는 외려 많이 써낸다고 짜증을 내는가. 왜 어떤 법관들은 자기가 믿는 결론을 정해놓고 재판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가. 왜 어떤 법관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그리도 재판을 서두르는가. 왜 어떤 판결에는 ‘상고이유가 되지 않는다’라는 간단한 이유만이 붙어 있는가. 그리하여 법을 모르고 절차를 처음 구경하는 사람들은 의아해하고, 법을 조금 알고 절차에 익숙한 사람들은 걱정한다. 법관은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가. 법관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절차가 마무리되어 마지막으로 판결이 선고될 때 이긴 당사자들은 판결문을 별로 읽지 않는다. 이겼으니까 된 것이다. 그러나 진 당사자들은 한 자, 한 자 철저히 읽는다. 결론에 대한 일방 당사자의 불만은 판결의 숙명이지만 그 이유에 소통을 부여하는 일은 법관의 책무다.



 늦은 밤 서울 서초동을 지나며 늘 보는 법원 청사의 불 켜진 창, 그곳에서 법관들은 기록을 보고 판결을 쓴다. 법관들은 모두 과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예전에 그랬지만, 법관들은 의아해한다.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데 도대체 왜 판결을 가지고 시비인가라고. 이제 법관들은 법정과 판결에서의 소통이야말로 사법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되찾아오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인진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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