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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링컨의 모자

중앙일보 2011.04.23 00:20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 14일 오전 10시쯤. 워싱턴DC의 스미스소니언 미국역사박물관의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입구는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파묻히다시피 하며 나는 간신히 출입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3층 전시실로 향했다. 거기엔 146년 전인 1865년 4월 14일에 링컨 대통령이 포드극장에서 암살당할 당시 썼던 모자가 전시돼 있었다. 인생 자체가 숱한 실패로 점철된 사내였지만 그랬기에 더욱 위대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모자를 보고 있노라니 묘한 전율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뚫어져라 링컨의 모자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뒤이어 정말이지 쓰나미처럼 학생들이 몰려왔다. 나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서 나왔다. 146년 넘게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남은 모자에 담긴 여운조차 그들에겐 애국심의 원형질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엔 해마다 2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린다. 특히 이곳엔 미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수학여행 형식을 빌려 단체로 몰려든다. 그들이 내셔널 몰의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 미국역사박물관 등을 휘젓고 다닌다. 물론 떠들고 장난치며 잡담하는 것이 우리네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내셔널 몰을 몰려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공부가 되고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레 애국심의 바탕이 된다. 정녕 미국의 애국심은 내셔널 몰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미국의 힘은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만이 아니다. 수많은 인종과 다양한 지역적 요구를 하나로 묶는 애국심의 쉼 없는 분출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힘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게 애국심을 만들어내는 내셔널 몰은 진정 미국의 가장 강력한 소프트파워요 어떤 점에선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미국은 다인종·다문화 국가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9·11 참사가 있은 이듬해인 2002년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미국적 인종이란 없다. 미국적 신념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에서 애국심은 다양한 인종과 차이 나는 문화를 녹여내서 결속하는 용광로요 접착제다. 아니 그들에게 애국심은 하나됨에 필수적인 신념이요 또 다른 의미의 종교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 우리 사회에서 요즘 떠오르는 화두 중 단연 주목할 것도 다름 아닌 ‘애국심’이다. 최근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P세대’란 말도 여러 함의가 담겼다지만 그중 가장 우선되는 것은 ‘애국심(Patriotism)’에 눈뜬 세대란 의미다. 그뿐만 아니라 잠재적 대선후보 중 한 사람인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대표마저 “애국심이 사악하거나 위험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진보주의자들은 ‘애국심’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며 “정당과 정치인은 애국심을 북돋울 의무가 있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 우리 군(軍)은 군인복무 규율 5조에 따른 장교임관 및 병사입대 선서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로 시작하는 선서 내용에서 ‘민족’이란 말을 빼고 이를 ‘국민’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이른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군에 속속 입대하는 현실을 반영한 불가피한 조치다. 그러니 앞으로 대한민국을 묶어나갈 유일한 접착제는 ‘애국심’밖에 없다.



 # 미국민의 애국심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조차 용퇴했던 것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초대 대통령이 머뭇거리다 하야(下野)의 쓴잔을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결국 진정한 애국심은 이 나라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리그’이며 ‘그만의 나라’가 아닌 ‘우리 모두의 나라’라는 믿음과 확신 속에서만 자란다. 링컨의 모자가 146년 동안 말없이 웅변한 것 역시 바로 그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것 아니겠는가.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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