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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함이 아름다움을 내쫓고 있다, 자기가 더 예쁘다며

중앙선데이 2011.04.23 00:08 215호 4면 지면보기
1 미의 역사(2005) 2 추의 역사(2008)
몇 년 전 한밤중에 잠을 깨운 전화. 급한 일인가 싶어 안 받을 수가 없다. 지인은 숨넘어갈 듯한 소리로 흥분해서 말한다. 방금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키키 스미스의 회고전을 보고 나오는 길이란다. 잘려져 나간 손, 전시장 벽에 부딪혀 떨어진 까마귀 시체들,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오줌 줄기, 거기다가 관람객을 준범죄인으로 만드는 전시장 지킴이들의 희번덕거리는 눈까지. 전시는 너무 그로테스크하고 충격적인데, 너무 좋았으며 폐부를 찔린 듯이 감동적이란다. 그러면서 자기가 혹시 변태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14> 움베르토 에코의『미의 역사』『추의 역사』

미국의 여류 조각가 키키 스미스는 좋은 작가이고 좋은 전시를 보고 흥분하는 것은 절대 변태적인 일은 아니다. 인간의 허약함, 육체의 구속력, 실존적인 한계를 키키 스미스보다 더 명료하면서도 풍부한 언어로 보여주는 작가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나의 지인이 자신을 변태라고까지 의심한 이유다. 그러나 키키 스미스의 작품은 진실 되다. 진실이 지렛대가 되어 추한 형상들이 미의 영역으로 넘어간 경우다. 키키 스미스뿐 아니라 많은 현대 미술은 미술이란 말을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엽기적이고 흉악하며 추하다. 이제 추는 미의 부정이 아니고 미의 다른 얼굴이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와 추의 개념은 여러 역사 시기마다, 또는 다양한 문화마다 상대적이다.” 그러니 역사가 쓰여지는 것 아니겠는가? 움베르토 에코는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각 5만5000원, 열린책들)라고 굳이 나누어 두 권으로 썼지만, 인간의 삶에는 미와 추가 함께 공존하며 서로 자리다툼을 해왔으니 한 권처럼 읽어야 한다. 책은 그간의 역사가 추를 끌어안을 정도로 미의 영역이 확산되어온 과정이며, 동시에 추가 미를 밀어내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3 퀸텐 마세이스의 ‘그로테스크한 여인’(1525~1530), 런던 국립박물관
미학(Aesthetic)은 있었지만 추학은 없었다. 추는 연구되었다기보다 다양한 예술의 영역에서 실현되었으며, 미학은 이렇게 예술에서 묘사된 추를 구제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할애하며 발전해왔다. 당연히 『미의 역사』는 중반 이후부터는 『추의 역사』와 상당 부분 겹쳐진다. 역사 속에서 추는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처럼 만인이 존경하는 훌륭한 철학자의 못생긴 얼굴에 나타났고, 낙원에는 징그러운 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더 나아가 그것은 공포스러운 것, 희극적인 것, 외설스러운 것, 근현대 사회에서는 사회고발이라는 묵직한 진실들과 섞여 왔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어떤 형태의 추든 충실하고 효력 있는 예술적 묘사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천했다. 때문에 『미의 역사』는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고 반대로 『추의 역사』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움의 기본 관념을 나타내는 단어인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는 칼로스(kalos·아름다움)와 아가토스(agathos·선)를 결합한 단어다. 선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악은 추한 것이었다. 이 관념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주름진 어머니의 웃음이 아름다운 것은 선하기 때문이다. 이 진선미의 공고한 결속관계와 조화로운 형태로서의 미의 관념을 깬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과학의 발전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지리상의 발견, 천문학과 물리학의 발전은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르네상스적인 유토피아의 몰락을 초래했다.

17세기 바로크시대에는 선과 악을 넘어선 미가 표현됐다. 추를 통해 미를, 거짓을 통해 진실을,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과 미의 공고한 관계에 더 큰 균열이 생겨났다. 계속되는 지구상의 발견과 여행의 증가로 늘어난 것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미지의 세상에 대한 더 많은 공포감이었다. 미지의 것, 낯선 것을 처음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추하고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18세기에 등장한 ‘숭고’의 개념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존재에서 비롯되는 감정인 공포를 미적인 영역에 포함시키는 역할을 한다. 19세기 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던 데카당스들의 유미주의는 도덕과 미를 결정적으로 분리해낸다. ‘아름다운 악마’라는 말처럼 아름답기에 악마는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처에서 가치전도가 이루어지고 죽음과 쇠락, 부패, 에로티시즘 등이 공공연히 찬양되며 추는 예술의 영역 속에서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다.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이후의 현대미술에 이르러 추는 절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 같다. 엽기적이고, 퇴폐적이고, 외설적이고, 오물을 재료로 하기도 해서 관람객들을 괴롭히는 현대미술은 추의 경연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전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나쁜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에코가 인용하고 있는 수잔 손탁의 말대로 “20세기 많은 작품들의 목표는 조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격렬하고 해결할 수 없는 테마를 다루는”데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추가 절대적으로 증가되었다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소설보다 더 황당한 현실, 엽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추한 현대미술보다 더 추한 현실이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현실의 추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추를 통해 예술이 정복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의 정독법은 추라고 쓰고 미라고 읽는 것을 권장한다. 미가 쾌감과 관련 있듯이 추도 쾌감과 관련 있다. 현대인들은 추한 것을 보면서도 일말의 진실을 발견한다면 어떤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됐다. 한밤중에 뉴욕에서 걸려온 지인의 전화는 이런 쾌감의 전율을 실어나른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추의 역사』에서 “이 책의 수많은 글귀와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추를 인간적 비극으로 이해하도록 권하고 있다”며 책을 끝맺는다. 세상에 대한 연민을 호소하는 세계적 석학의 자조적인 문장이 씁쓸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품고 있는 많은 문헌 및 시각적 자료는 아직 논의가 다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의 문제, 예술적 진실의 문제는 여전히 예술의 담론적 기능에 대한 논의와 함께 계속되어야 할 주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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