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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대학생 햄릿의 번민, 400년이 지난 지금도

중앙일보 2011.04.21 01:42 종합 8면 지면보기



“사느냐, 죽느냐” 셰익스피어의 『햄릿』
KAIST 잇단 자살로 본 젊은이의 고뇌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레이쇼(1839),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작, 캔버스에 유채, 66x81㎝, 루브르 박물관, 파리.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대학생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비극 『햄릿』의 대사를 보면 그가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다 부왕(父王)의 서거 소식에 덴마크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몇몇 학자들은 햄릿이 대학생이라 더욱 고뇌가 컸다고 말한다. 지적인 회의(懷疑)가 많으며, 또 순수한 이상에 반하는 참담한 현실을 더 민감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고뇌 속에 외친 햄릿의 독백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는 최근 KAIST 등에서 자살로 스러져간 대학생들의 고민을 연상시키며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햄릿이 다녔다는 비텐베르크 대학은 실존하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교수로 일하면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의문을 제기하는 ‘95개 논제’를 대자보로 써 붙였던 것이다. 결국 루터는 파문당하고 몸을 숨겨야 했다. 이처럼 대학은 신선한 지성(知性)으로 기존에 진리라고 믿어진 것을 의심하고 사색하는 곳이며, 또 그 지성으로 세운 이상이 현실과 충돌하는 것을 겪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이 생각하고 회의하고 고민하게 된다. 햄릿 역시 그랬다.









햄릿의 연극 장면(1897), 에드윈 오스틴 애비(1852~1911) 작, 캔버스에 유채, 크기 미상, 예일대 아트 갤러리, 하트퍼드.



 1막에서 부왕의 유령이 햄릿에게 나타나 자신이 동생(햄릿의 숙부)에게 독살당했음을 알렸을 때 햄릿은 “내 예감이 맞았군” 하며 분노한다. 그는 처음부터 숙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유령 또한 의심한다. 자신의 불안정한 마음을 파고드는 악령이나 환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 숙부에게 왕 독살 장면이 나오는 연극을 보여 심리적으로 압박하기로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이런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유령을 쉽게 믿지 못하는 자기자신에게 욕을 퍼붓는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83)는 이러한 햄릿이 “지적, 사색적, 비행동형 인간의 전형”이라고 유명한 에세이 『햄릿과 돈키호테』(1860)에서 말했다. ‘행동형 인간’ 돈키호테 같았으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유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가 숙부를 해치웠으리라. 투르게네프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돈키호테 쪽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가 행동하는 지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19세기 지식인들은 햄릿 쪽에 더 가까웠다.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행동의 결과를 부작용을 포함해 따져 보는 것이 지성인의 속성이며 또 의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별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는 햄릿의 독백처럼 그것을 스스로 냉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은 햄릿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도 그랬다. 그는 스스로를 검은 상복을 입은 햄릿으로 묘사한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고, 햄릿이 5막에서 교회 묘지 일꾼들과 만나는 장면을 유화(위의 그림)와 석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햄릿은 일꾼이 새 묏자리를 파다 발견한 해골이 어린 시절 그를 놀아주던 광대 요릭이라는 것을 알고 해골을 든 채 인간의 필멸과 그 허무함에 대해 독백한다.









오필리아(1851~52), 존 에버렛 밀레이(1829~96) 작, 캔버스에 유채, 76x112㎝, 테이트 브리튼, 런던.



 곧이어 햄릿은 연인 오필리아의 장례 행렬을 보게 되고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이 비극의 애꿎은 희생자들 중 한 명이었다. 햄릿이 숙부에게 연극을 보이는 장면을 그린 미국 화가 오스틴 애비의 작품(그림①)에서는 그녀의 순진무구함이 강조된다. 검은 옷의 햄릿은 날카롭고 우울한 눈으로 숙부인 왕을 주시하고 있고 죄와 간통을 상징하는 진홍색 옷을 입은 왕과 왕비는 당혹감에 굳어져 있다. 다른 이들도 긴장과 불안을 느끼는 모습이다. 이 분위기에서 오직 밝은 색채의 옷에 해맑은 표정을 한 오필리아만이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햄릿은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그로 인한 여성 전반에 대한 의심 때문에 오필리아도 믿지 못하고 거친 말을 퍼부어 상처를 준다. 그 와중에 햄릿이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숙부로 착각해 죽이자 오필리아는 그간의 고통이 폭발해 미쳐버린다. 결국 그녀는 실성한 채로 꽃을 꺾으며 돌아다니다 냇물에 떨어져 익사했다.



 오필리아의 마지막은 이렇게 묘사된다. “옷이 활짝 펴져서 잠시 인어처럼 물에 떠 있는 동안 그 애는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본래 물 속에 태어나고 자란 존재처럼 옛 노래 몇 절을 불렀다는구나.”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그림②)은 이 대사를 절묘하게 묘사해 수많은 오필리아 그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햄릿은 오필리아와 달리 마지막에 숙부를 죽이고 자신 역시 죽는 순간에도 사후의 일을 염려하며 번민을 놓지 못한다. 어쩌면 고뇌는 지성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대학생들의 경우에는 그 이상이 더 풋풋하고 크기에 고뇌도 더 클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의 자살은 개인의 마음가짐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학교 시스템의 개선 등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문제다. 그러나 “죽음의 잠 속에서 어떤 꿈이 올지 모르니” 죽음은 고뇌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햄릿의 독백은 학생들이 기억해둘 만하다.



문소영 기자





“너희들도 연극배우냐?” 햄릿의 ‘원조 독설’











셰익스피어(그림)의 생애는 베일에 싸여 있어서 그 정체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 다. 셰익스피어가 한 명이 아니라 작가 그룹의 필명이라는 설도 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엘리자베스 1세가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유력한 설은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 겸 배우가 실존했다는 것이다. 햄릿이 극중극 배우들에게 충고를 하는 대사를 보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배우였다는 설에 신뢰가 간다. “여느 배우들처럼 소리나 고래고래 지르고 수선을 떨 바엔 거리의 약장사들을 데려다 시키겠네…격정이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날 때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자제심이 필요해.” 현대 연기자들도 새길 만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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