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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만추 만추’ 하는 이유 … 강렬하니까, 당대 여배우 있으니까

중앙일보 2011.04.19 00:30 종합 28면 지면보기



우리시대의 영화 고전 ‘만추’ 리메이크작 4편 특별전서 만난 김수용·김태용 감독



1981년과 2010년. 29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만추’의 선·후배 감독이 만났다. 김수용 감독(왼쪽)과 김태용 감독은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만추’는 앞으로도 계속 리메이크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도훈 기자]



44세로 요절한 이만희 감독(1931∼75)의 ‘만추’(1966년)는 한국영화사의 전설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만추’를 본 후 “외국인들이 잉마르 베리만(1918∼2007, ‘제7의 봉인’‘산딸기’등을 연출한 스웨덴 거장)을 꼽는다면 나는 이만희를 얘기하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만추’는 45년간 네 번 리메이크됐다. 72년 일본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약속’, 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 81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 올 초 85만 관객을 동원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다. 10년에 한 번 꼴로 다시 만들어진 셈이다. 15차례 영화화된 ‘춘향전’을 제외하면 한국영화사에서 이런 작품도 드물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이 마련한 ‘만추, 늦가을의 정취에 빠지다’에서 리메이크작 4편이 상영됐다. 특별전에 참석한 김수용(82) 감독과 김태용(42) 감독을 17일 만났다. 나이로는 40년, ‘만추’로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이들 사이에 놓여있었지만 ‘만추’라는 공통분모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김수용 감독은 “나보고 다시 ‘만추’를 찍으라고 하면 (잘 생긴)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 주연으로 하고 싶다”는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만추’는 58년 데뷔 후 109편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다. “이만희 감독하고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하도 기자들이 우리를 라이벌이라고 싸움을 붙여서 좀 소원하던 참이었어요. 시사회에서 이 감독의 ‘만추’를 보곤 너무 좋아서 내가 악수를 청하고 화해했죠. 문정숙·신성일 두 배우가 벤치에 앉아있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요. 빈 배 두 대가 출렁거리다 부딪치는 걸 두 남녀의 심리묘사에 절묘하게 이용했죠. 살아있었으면 칸영화제에서 상도 많이 탔을 거에요. 정말 뛰어났죠. 그런 점에서 내 ‘만추’는 이 감독에게 바치는 우정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원작은 필름이 없어진 탓에 현존 영화인 중에는 본 사람이 거의 없다. 김태용 감독이 ‘만추’에 ‘입문’한 것도 81년작을 통해서다. “저희 세대에게 ‘만추’는 김수용 감독님 작품이 원전(原典)이죠. 서정적이고 쓸쓸한 가을 느낌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농염함이 강렬했어요. 연상녀·연하남 설정도 80년대로선 파격적이었죠. 원작의 꽃미남(신성일)·꽃미녀(문정숙)를 우리 동네 아저씨(정동환)·아주머니(김혜자) 같은 일상적 느낌으로 바꾼 것도 큰 특징이었어요.”



 “김태용 감독의 ‘만추’를 보니 ‘난 단군시대 감독이구나’ 싶더군요. 멋쟁이 영화에요. 무대를 제3국(미국 시애틀)으로 옮겨서 남자(한국인)와 여자(중국계 미국인)가 말도 안 통하게 해놓고, 거기에 안개까지 근사하게 섞었더군요. 촬영·편집·음악 등 모든 면에서 젊은 감각이 돋보였어요. 인간의 고독, 사랑에 배반당한 여성의 응어리도 집요하게 표현돼 있고. 현빈씨 봐요. 희대의 색남(色男)이잖아. 난 일부러 촌스러운 인상을 주려고 정동환씨를 캐스팅했어요. 김혜자씨가 외모에 반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에 끌리는 설정이니까.”



 김수용 감독은 현빈과 탕웨이의 키스 장면에 대해 “진짜 연기한 거냐”고 물었다. 김태용 감독이 “‘이 키스는 정말 길 거다. 절대로 컷을 하지 않을 테니 끝까지 한 번 가보자’고 하면서 찍었다”고 대답했다. “허, 놀랍네. 우리 때는 입만 그냥 댔다가 뗐어요. 검열과 도덕이 용납을 안 했죠. 배우들이 유부남·유부녀인데 어떻게 키스를 진짜로 해요? 노출 장면 도 김혜자씨가 ‘벗으려고 배우 한 것 아니다’고 버텨서 대역을 썼어요. ”(김수용)














 ‘만추’가 45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휴가 나온 여죄수와 쫓기는 남자의 짧은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갖는 힘이 워낙 강렬한데다 당대의 여배우들이 잊을 수 없는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라는 데 공감했다. “이야기가 강렬하면서도 해석의 여지가 워낙 풍부하죠. 서로의 남루한 상황을 껴안아주는 남녀의 사연에서 이방인의 교감으로 바뀔 수 있는 이야기는 흔치 않죠. 그게 고전의 힘, 원형의 힘 아닐까 싶어요.”(김태용)



 ‘만추’의 원작자는 김지헌(83)작가. 반공법 위반(‘7인의 여포로’)으로 구속돼 감옥살이를 했던 이만희 감독이 교도소 동료로부터 들은 귀휴(모범수의 짧은 휴가) 얘기가 실마리가 됐다고 한다. ‘만추’는 여배우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문정숙(이만희)·김지미(김기영)·김혜자(김수용)·기시 게이코(사이토 고이치)·탕웨이(김태용) 등 당대의 여배우들이 스크린을 장악했다.



 “문정숙씨는 풍부한 연기력과 정서가 돋보였죠. 황홀했어요.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었죠. 신성일씨가 여배우에 가린 느낌이 들어요. 김혜자씨는 당시 ‘죽어도 영화 안 한다’는 걸 ‘문정숙보다 당신이 훨씬 잘 할 거다’고 겨우 설득 했어요. 결국 제2회 마닐라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죠. 시상식 파티에서 당시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하고 춤도 췄어요. ”(김수용)











 “여배우들 중 탕웨이가 가장 나이가 어릴 때(31세) ‘만추’를 한 거에요. 문정숙 37세, 기시 게이코 40세, 김지미 35세, 김혜자 40세 이렇거든요(제작년도 기준). 너무 어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성숙한 이미지 덕에 좋은 연기가 나왔죠.”(김태용)



 ‘만추’ 리메이크는 한국 고전의 재해석, 재발견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만추’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김수용 감독은 “‘만추’ 리메이크는 계속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예전에 장 뤽 고다르(프랑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이탈리아) 등 해외 유명감독을 보고 영화의 꿈을 키웠던 시절이 있었죠. 저희는 유현목·신상옥·김수용 감독님을 보고 자극 받은 첫 세대가 아닐까 싶어요. ‘만추’ 리메이크처럼 한국 고전영화의 맥을 이어가는 작업이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김태용)



글=기선민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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