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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내곡동 잔혹사’, 이제 끝내야 할 때

중앙일보 2011.04.18 00:28 종합 35면 지면보기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국정원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차장과 3차장을 경질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임명식에서 이 대통령은 “과거에는 정보기관이 정권 유지를 위해 일했지만 지금은 국익 차원에서 일해야 하며 철저한 프로정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신임 두 차장에게는 “신속히 조직을 장악하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참으로 옳은 이야기다. 정권 안보가 아니라 전문가적 자세에서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정보기관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 정부 초기 국정원 개혁 작업에 관여했던 필자로서는 한 가지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과거 국정원의 정권 유지 노력’에 관한 부분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울 만큼 국정원의 비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법을 지키는 국정원’을 위해 고영구·김승규 등 정치적 색채가 옅은 법조계 인사를 원장으로 임명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獨對)가 정보기관에 뜻하지 않은 힘을 실어주어 국내정치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해 그러한 관행을 없애기도 했다. 모든 국내 관련 정보는 국정상황실, 대북 및 해외정보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를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아예 국정원 내부에도 국익정보실을 신설하고 여타 국내 담당부서를 대폭 줄여 나갔다. 참여정부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도리어 이번 차장 인사야말로 ‘철저한 프로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신임 1차장과 3차장 모두 검증을 통과할 만한 자질을 갖췄겠지만 그러나 전문성은 별개 문제다. 특히 지금처럼 원장이 비전문가 출신인 경우 차장직의 전문성은 더욱 중요하다. 1차장이 해외 및 대북 정보, 3차장이 산업보안, 외사방첩, 대북공작의 최고 전문가여야만 권위 있는 정보판단으로 원장과 대통령, 나아가 국가 전체를 보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 전통과 철학이 굳건히 자리 잡은 선진 정보기관들을 보자.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영국 해외정보부(MI6), 이스라엘 모사드 등에서 공작이나 분석을 담당하는 2인자 자리에 외부의 비전문가를 보임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지금의 국정원은 원장과 1, 2, 3차장에 기조실장까지 모두 외부 출신이다. 이런 식으로 과연 최고의 전문성을 갖춘 선진 정보기관이 될 수 있을까.



“신속히 조직을 장악하라”는 주문도 어폐가 있어 보인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비서실의 외연을 확대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와 대통령을 위해 죽고 사는 조직이다. 대통령의 정보 소요 제기와 국가이익목표 우선순위(PNIO)에 따라 정보를 수집, 분석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국정원의 존재 이유다. 쉽게 말해 최고 정보 소비자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중립적 컴퓨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직을 ‘장악’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다분히 모순이라는 느낌이 든다. 



과거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 같은 대북업무를 담당했던 최정예 국정원 직원들이 현 정부 출범 이후 ‘전임 정권 코드에 맞춰 굴신한 종북주의자’로 불리며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그럴 리 있겠나’ 반신반의했지만, 국정원을 여전히 ‘장악’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정도라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가능한 일 아니냐고? 차기 정부가 다시 포용정책을 표방한다면, 그래서 지금 대북 와해 및 심리적 공작에 종사하는 직원들을 ‘반동적 보수 꼴통’으로 낙인찍고 제거한다면, 그 역시 인정할 수 있을까. 



국정원은 국가안보의 첨병이며 어느 특정 정권의 전유물도 아니다. 더구나 국정원 요원들은 투철한 국가관과 자존심 하나로 음지에 파묻혀 일하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그들을 ‘개혁’과 ‘쇄신’이라는 이름으로 뒤흔들고 정권의 취향에 따라 희생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5년마다 되풀이돼온 ‘내곡동 잔혹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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