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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서남표 총장의 ‘공돌이’ 기질

중앙일보 2011.04.15 00:24 종합 34면 지면보기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서남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가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였다. 그는 MIT 기계공학과 학과장이었고, 나는 교육개혁 시리즈 취재차 출장 중이었다. 당시 MIT 기계공학과는 교수 58명에 강사도 50명이었다. 그런데도 다음해에 교수 10명을 더 충원하려고 전 세계에 추천을 의뢰해 놓고 있었다. “교수를 10명이나 더 뽑을 정도로 학과 형편이 좋은가”라고 묻자 서 박사는 간명하게 답했다. “우리는 많이 내보내니까.”



 대학 시절 융통성 없는 공대생 친구에게 농담으로 “공돌이 기질은 어쩔 수 없네”라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산업현장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니 오해 마시길). 미국에선 공부만 잘했지 놀 줄 모르고 대인관계에도 서툰 사람을 ‘너드(nerd)’라고 한다. 특히 MIT 학생은 ‘과학기술 바보’란 뜻에서 테키 너드(Techie Nerd)라 부른다. 진짜 바보라서 그러겠는가. 천재 기질에 더해 사회성도 갖추라는 조크 아니겠는가. 서남표 총장의 우직한 대학개혁 작업을 보면 죄송하지만 그에게도 ‘공돌이’ 내지 ‘테키 너드’ 기질이 다분한 것 같다.



 서 총장은 학자로도 대단하지만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84~88년 미국 과학재단(NSF)의 공학담당 부총재로 재임하면서 전체 과학기술 지원금을 좌지우지한 경력도 갖고 있다. 차관보급인 과학재단 부총재는 대통령이 추천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자리다. 그는 전통적인 연구 분야를 홀대하는 대신 나노 기술 같은 미래지향적 분야 지원을 확 늘렸다가 엄청난 반발에 부닥치기도 했다. 과학자 1600 명이 서 부총재를 쫓아내라고 서명한 건의서가 백악관에 전달됐다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일도 있다. 그런 서남표 박사가 2006년 KAIST 총장으로 부임했고, 대한민국의 대학 개혁에 비로소 제대로 시동이 걸렸다.



 학생 자살로 촉발된 KAIST의 위기를 한 교수는 “서 총장의 장점이 이번엔 단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독선을, 우직한 추진력이 소통 부족을 불렀다는 뜻이다. 사실 자살사건을 낱낱이 뜯어보면 개혁이 원인(遠因)이라면 몰라도 직접적인 인과관계라고 보기는 힘들다. 영어강의도 분명 효과가 있었다. “산업공학과 4학년생 제자가 해외유학 경험이 없는데도 산업공학의 세계적 명문 조지아 공대(GIT)에 교환학생으로 가자마자 A 학점을 받아내더라”고 다른 KAIST 교수는 말했다. 게다가 KAIST의 영어강의 정책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영어에 소홀했던 국내 고교, 특히 과학고들에 즉각 영향을 미쳤다. “요즘 입학하는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의 생활 환경, 정서 측면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교수 중에도 “총장이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 없는 듯해 좌절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사람이 있는 판에 어린 학생들은 오죽하겠는가. 영어강의에도 융통성이 필요할 것이다. 역시 걸림돌은 개혁 과정에서 부각된 서 총장의 ‘독선과 소통 부족’ 이미지다. 한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도 상징적이다. “미국에서 금융공학을 전공한 학자가 교수채용 후보로 총장 면접을 보게 됐다. 서 총장이 그의 박사논문에 대해 물은 뒤 문제를 던졌다. ‘당신의 금융공학 연구주제와 열역학 제3법칙을 통합해 연관 관계를 설명해 보라’고. 농담 또는 지적 유희로나 가능한 질문이었다. 황당해진 후보자는 제대로 답변을 못 했고, 결국 탈락했다.” 건축과 교수 등이 참여한 건물입지선정위원회에서 결정된 신축건물 위치가 서 총장 한마디에 엉뚱한 장소로 바뀐 적도 있었다.



 나는 서 총장의 우직한 ‘공돌이 기질’이 다시 장점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소통기능 회복이 첫째다. 그가 터를 닦은 대학개혁이 KAIST를 넘어 전국으로 퍼져가길 희망한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서 총장의 거취가 아니라 대학개혁이 사느냐 죽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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