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⑤ 참스승에게 배운 지도자론

중앙일보 2011.04.13 00:04 경제 9면 지면보기



“추진력·전문지식·청렴·신망 … 지금도 못 잊는 김진형 인사 원칙”



한국개발금융 김진형 사장이 1978년 2월 제11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조직 발전을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고 김진형(1905~1987) 한국개발금융 사장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가 경영자 승계 문제였다. 그는 취임 3년 뒤 재임을 할 때부터 조직 승계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본 금융회사들의 사례를 찾아 공부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도 “승계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1978년 2월 24일 한국개발금융 주주총회 자리에서 김진형 사장이 폭탄선언을 했다. 전격적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임직원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그가 물러나야 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1966년부터 회사 설립을 주도해 기존의 금융회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금융회사를 설계하고 이를 훌륭히 키워왔다. 외형으로 보나 내실로 보나 경영성과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는 한국개발금융에 대한 세계은행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회사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때였다. 모든 조직원은 이런 때일수록 김진형 사장을 중심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만 작금의 중대한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퇴진을 바라지 않았다. 주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 사장은 “한국개발금융은 큰 변화기에 왔다. 지금이 바로 새로운 인물이 와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조직 변화를 이끌어나갈 때”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갑작스러운 퇴진 선언이었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퇴진을 준비해 왔다. 그가 그만둘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건 폭탄선언이 있기 몇 달 전인 1977년이었다. 당시 김 사장과 함께 국제금융공사(IFC)의 본부가 있는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IFC의 담당 국장과 자신의 퇴진 문제를 상의했다.



 “기업들의 투자자금 수요가 달러화에서 원화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는 회사가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리더십을 바꿔 새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몇 달 뒤 김 사장은 사의를 전격 발표했다. 지금이 바로 자신이 물러날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아무리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도 조직을 위해서는 물러날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정신은 장기신용은행과 한국투자금융·하나은행에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내가 6년 만에 하나은행장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김 사장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김 사장이 퇴진의사를 밝힌 지 두 달 뒤인 5월 9일 회사는 신임 사장에 김봉은씨를 선임하고 김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김봉은 사장은 한국은행 출신으로 도쿄지점에서 김진형 사장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한국개발금융 사장으로 발탁된 것은 김진형 사장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리더는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김 사장은 자신의 후임으로 내부인사를 기용하는 방안도 검토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임자는 한국개발금융을 장기신용은행으로 전환시키는 대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야 했다. 그가 적임자로 은행장 경험이 풍부한 김봉은씨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한국개발금융은 1980년 장기신용은행으로 전환됐고, 나는 상무로 있었다. 그 후 1982년 인사에서 김진형 회장과 김봉은 은행장이 나를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 전무로 보내려고 했다. 특히 김 회장은 여러 가지 약속을 하며 설득에 앞장섰다. 나로선 도저히 수긍이 안 되는 인사여서 김 회장 집에 찾아가 “자리를 옮길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잠자코 듣던 김 회장은 지도자상과 관련한 신문기사를 오려뒀다가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 적혀 있던 지도자의 조건 네 가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추진력과 전문지식이 있고, 주변이 깨끗하며 내외에 신망을 갖출 것.” 김 회장은 그때 “지도자라는 건 대내외적인 신망이 있어야 한다. 내부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고 밖에서 보기에도 저 사람은 저 자리에 갈 만하다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뒤 나는 한국투자금융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내가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로 활동할 때 알게 모르게 이때 경험한 일들이 많은 도움이 됐다. 후에 김 회장도 한국투자금융 회장으로 옮겨오셔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지도해주었다.



 김 회장은 ‘지도자는 스스로 태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위에서 찍어서 지도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일과 경쟁을 통해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발탁하면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20 여 년을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심어준 지도자상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정리=한애란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