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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취하고 싶을 땐 피스코, 즐기고 싶을 땐 모비 와인

중앙일보 2011.04.12 00:27 경제 22면 지면보기
칠레 하면 술이 먼저 떠올랐던 건, 오로지 와인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중저가 와인의 태반이 칠레산이어서다. 이번 칠레 여행에서도 와인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싸게 와인을 공급할 수 있을까 처음엔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칠레에도 우수한 품질의 하이 레벨 와인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덩달아 칠레 고유의 서민 술도 맛볼 수 있었다.



글·사진=이상은 기자





# 칠레산 하이 레벨 와인을 맛보다









칠레에 가면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35시간의 비행도 설레기만 했다. 그곳엔 하이 레벨 와인이 있었고 막걸리의 역사를 닮은 서민 술이 있었고 고집스러운 원주민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과 닮은 정(情)이 있었다. 함께 한 세계 각국 저널리스트들과 칠레 현지인들에게 “꼭 한국에 오라”는 말을 건네며 헤어지는 순간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사진크게보기>





칠레는 1990년대부터 세계 와인 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칠레는 줄곧 생산량 대비 수출 비율은 와인 수출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칠레에서 생산하는 와인 대부분이 수출된다는 얘기다. 칠레는 수출 주도형 와인 생산국이다.



 짧은 기간에 칠레가 와인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칠레의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일교차가 큰 날씨, 안데스산맥 빙하에서 녹아내리는 청정수, 구리 성분을 많이 함유해 병균에 강한 토양 등 여러 조건이 모두 포도 재배에 유리한 환경을 형성했다. 여기에 유럽보다 한참 싼 인건비가 칠레 와인의 가격을 낮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산티아고 남쪽 센트럴밸리의 와이너리. 하얀 집이 드넓은 포도밭을 배경으로 서 있다. 집 마당에 들어서니 와인 파티를 위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이미 20명이 넘는 사람이 와 있었는데, 이들은 와인공동체 ‘모비(www.movi.cl)’의 회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모비’는 ‘독립적인 포도주 상인의 모임(Independent Vintners Movement)’이라는 뜻으로, 2년 전 칠레에 있는 와이너리 18개가 모여 만든 공동체다. 마케팅은 공동으로 진행하지만 각자 와이너리 색깔은 철저히 지킨단다.









‘모비’는 소량 생산 독립 와이너리들의 공동체다. 이들은 “칠레 와인은 싸구려라는 인식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모비 공동체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공장 형태의 대량 생산을 피하고 포도 재배부터 와인 포장까지 오너가 직접 하는 소규모 와이너리다. 1년에 1만 케이스(1케이스에 와인 12병) 이하를 생산하면 대체로 소규모 와이너리로 통하는데, 모비에 속한 와이너리는 1년에 각자 2000케이스만 생산한다. 그래서 수퍼마켓 같은 데는 모비 와인이 없다. 고급 레스토랑과 해외 바이어에게만 공급하며, 일반 칠레산 와인보다 3배 비싼 가격에 팔린다.



 모비 회원이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가져온 와인을 하나씩 꺼냈다.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즈 등 레드 와인은 다양한 종류가 나왔지만, 화이트 와인은 보이지 않았다. 칠레 와인 생산량의 75%가 레드 와인이다. 칠레를 대표하는 와인 품종을 물으니까 하나같이 ‘카르메네르’라고 대답했다. 카르메네르는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로, 1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이제는 완전히 토착화돼 프랑스산보다 생산량에서 크게 앞선다. 한 잔 마셔보니 진한 과일 향이 오래 이어졌다.



 모비 공동체를 만든 펠리페 가르시아(40)는 “오너가 직접 만드는 소량 생산 와인이란 점에서 우리는 칠레 와인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했다”며 “이미 일본과 중국에는 진출했고 한국과는 6개월 전 계약을 맺었다”고 소개했다. 아시아 3국의 와인 성향을 물어보니 재미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본은 프랑스 ‘무통’ 같은 고급 브랜드만 찾는 경향이 있고, 중국은 아직 와인 문화가 덜 발달해서 선물용으로만 나간다. 반면 한국은 와인에 관하여 꽤 합리적이다. 와인을 공부하려는 욕구도 무척 강하다. 다만 한국인이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 한국엔 막걸리, 칠레엔 피스코









칠레 젊은이들은 와인보다 피스코를 더 많이 마신다. 주로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는데 가장 전통적인 것은 레몬·라임·설탕과 섞는 ‘피스코 샤워’. 요즘 유행은 콜라와 섞어 마시는 ‘피스콜라’다.



1540년 즈음. 정복자 스페인이 남미에 포도나무를 들여왔다. 그들은 포도를 선별해 와인을 만들었고, 선별 과정에서 버려진 포도는 남미의 농민이 와인을 만들어 증류했다. 증류해 놓고보니 보관 조건이 까다로운 와인과는 달리 잘 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남미 서민의 술 피스코가 탄생했다. 피스코는 칠레와 페루를 대표하는 서민 술이다. 소주처럼 투명하고, 원액으로 마시면 무척 쓰고 독하다.



 피스코는 와인을 증류해 만든다는 점에서 브랜디나 코냑과 주조방법이 같지만, 오크통이 아니라 스틸 컨테이너에서 숙성한다는 점이 다르다. 숙성 기간도 6개월을 넘지 않는다. 칠레에선 동네 수퍼마켓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고 값도 750mL 기준으로 한국 돈 5000~1만원이면 살 수 있다. 가장 비싼 것도 2만원을 넘지 않는다.



 칠레 피스코 시장의 58%를 차지한다는 브랜드 ‘피스코카펠(www.piscocapel.com)’의 생산 공장을 찾았다. 피스코카펠에 도착하니 환영의 의미로 피스코 샤워를 만들어줬다. 피스코 샤워는 피스코에 레몬·라임·설탕·얼음을 섞은 칵테일로 피스코 칵테일 중 가장 보편적이다. 새콤달콤한 피스코 샤워를 홀짝홀짝 마시니 어느새 얼굴이 달아올랐다. 피스코 원액 도수가 40도였다. 피스코는 35도, 40도, 40도 이상으로 분류된다.



 피스코카펠의 재비어 마르코스(44) 사장을 만났다. 와인 사업도 병행해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는 그는 한국의 소주와 막걸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인이 소주와 막걸리 중에서 어떤 술을 선호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칠레에서도 와인과 피스코는 우열을 가르기 힘들다. 피스코는 독한 술을 찾는 젊은 층이, 와인은 천천히 술을 즐기고 싶은 중·장년층이 선호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요즘 칠레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술이 있다. 일명 ‘피스콜라’. 피스코를 콜라와 섞은 것이다. 비율은 제 각각이지만 한 가지 원칙은 있다. 피스코와 콜라를 섞은 술잔을 손목시계 앞에 댔을 때 시계 바늘이 몇 시를 가리키는지가 보여야 한다. 술잔 뒤로 시계바늘이 보이지 않으면 콜라를 너무 많이 넣고 피스코는 적게 넣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칼럼니스트 루시 웨이버맨(60)이 말을 걸어왔다.



 “지난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한국 정부 초청으로 서울에 갔었다. 그때 한국 젊은이들이 막걸리를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는 모습을 보고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여기 칠레에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오랜 시간 한국인의 정서와 함께한 술 막걸리. 그리고 칠레 서민의 울분을 달랬던 술 피스코. 술잔 속에 눈물과 웃음의 역사를 담아왔을 두 술이 이제는 새로운 세대와 외국인의 입맛을 공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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