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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출병은 경솔”… 린뱌오, 작심하고 마오에게 직언

중앙선데이 2011.04.10 01:16 213호 33면 지면보기
전황 보고차 귀국하는 일선지휘관들을 환송하는 중공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왼쪽 첫째). [김명호 제공]
한반도 출병을 준비하던 마오쩌둥은 지휘관 선정을 서둘렀다. 저우언라이와 둘이서 류보청(劉伯承·유백승), 린뱌오(林彪·임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가오강(高崗·고강), 천이(陳毅·진의), 뤄룽환(羅榮桓·나영환) 등을 놓고 심사숙고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2>

저우언라이는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류보청을 추천했다. 마오는 생각이 달랐다. 난징(南京)에 군의 최고학부를 설립하고 류보청에게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당시 해방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는 거칠고 교양 없는 사람이 많았다. 마오는 “큰 재목은 큰일에 써야 한다”며 덩샤오핑도 제외시켰다. 천이는 대만 해방을 준비하느라 주둔지인 화둥(華東) 지역을 떠날 수 없었고, 뤄룽환은 겉모습만 멀쩡했다. 잔병이 많았다. 가오강(高崗)은 동북(東北)의 왕(王)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후방에 버티고 있어야 군수물자의 원활한 공급이 가능했다.

1950년 9월 초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우한(武漢)에 있는 린뱌오를 호출했다. 린뱌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직언을 용서해라. 미국 군대가 우리 경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군대는 함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출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경솔하다. 미군이 압록강 연안에 배치된다 해도 나쁠 게 없다. 가까이 온 적은 협상하기가 쉽다. 남북한이 싸우건 말건 그건 자기들 문제다. 단, 미 제국주의가 동북을 침범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바탕 붙는 수밖에 없다. 그때는 내가 직접 신발끈을 동여 매겠다.”

마오는 화들짝 놀랐다. 저우를 힐끔 쳐다봤다. 눈만 껌벅거리며 여간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린뱌오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결하자. 밥 먹으러 가자.” 린뱌오는 남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 몇 걸음 걷다가 슬그머니 손을 빼더니 계속 엉덩이에 문질러 댔다. 마오는 못 본 체 했다. 저우와 눈이 마주치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들었다. 이제 남은 건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밖에 없었다.

마오는 국방위원회 주석 자격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총사령관 주더(朱德·주덕)가 “홍군 시절 부총사령관이었고, 지금도 전군의 부총사령관”이라며 펑더화이를 추천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오가 박수를 치며 다른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펑더화이는 고생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후난(湖南)성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논어를 부지런히 읽었다. 8살 때 모친이 이상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호적에서 성과 이름을 완전히 지워버리라는 말을 남겼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 있었다. 10살 때부터 빈 밥그릇 들고 남의 집 문 앞을 기웃거렸다. 기를 쓰고 익혔던 성현의 말씀은 세상살이에 도움이 안 됐다. 없는 사람들의 도리(道理)를 찾기 시작했다. 군대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입대 며칠 전 외사촌 누이 저우루이롄(周瑞蓮·주서련)이 찐빵을 들고 찾아왔다. 약혼이라도 하고 가라며 졸라댔다. 펑은 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918년 스무 살 때였다. 2년 후 루이롄은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동네 지주에게 팔려가게 되자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펑더화이는 평생 저우루이롄을 잊지 못했다. 고향에만 돌아오면 루이롄이 살던 집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 너무 불공평하다”고 뇌까렸다. 30여 년 후 한국전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랬고,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장을 단 후에도 그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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