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9) 홀 지름 키운다고 골퍼의 번뇌 사라질까

중앙일보 2011.03.25 00:24 경제 18면 지면보기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으로 야구장 외야에 잠자리채가 깔렸던 2003년, 기자는 야구를 담당했다. 이승엽은 가끔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인다”고 했고, 그런 날 홈런을 펑펑 날렸다.



기자도 그런 경험을 했다. 몇 년 전 라운드 중 홀이 평소보다 훨씬 커 보였다. ‘나도 이승엽의 경지에 오르는구나’라는 생각에 흐뭇했다. 실제로 굴리면 쑥쑥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홀이 커 보인다고 했다. “기자 아니랄까 봐”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홀 크기를 재봤다. 홀은 규정보다 지름이1.5㎝ 정도 컸다. 캐디는 “진행을 빨리 하기 위해 규정보다 좀 큰 홀을 뚫는 것 같더라”고 귀띔했다.



골프 홀의 지름은 4.25인치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근의 유서 깊은 머셀버러 골프장에서 홀을 뚫던 파이프의 지름이 이 크기여서 그렇게 굳어졌다. 미터법으로 고치면108㎜다. 동양 골퍼들은 “홀 크기가 하필 108㎜여서 108 번뇌를 일으킨다”고 한다.



기자가 경험한 것처럼 국내 일부 골프장은 진행을 빠르게 하기 위해(손님을 더 받기 위해) 규정보다 약간 더 큰 홀을 뚫어놓기도 한다.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 테일러메이드의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킹은 “초보자가 골프를 좀 더 쉽게 즐기고, 라운드 시간을 줄이기 위해 홀의 크기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미국 월간지 골프 다이제스트가 현실성을 실험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난 11일(한국시간) 지름 15인치(약 38㎝)의 홀을 뚫어놓고 WIDE(넓은) 오픈 챔피언십을 열었다. 홀은 농구 골대(지름 45㎝)에 가까운 크기다.



참가자 60명 중 3퍼트를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퍼트 수가 가장 적은 사람은 15개였고, 성공한 퍼트 중 가장 긴 것은 19m였다. 참가자들은 “프로처럼 칩샷을 홀인시키거나 버디나 이글을 잡는 재미가 생겼다”고 했다. 참가자 60명 대부분은 평소보다 8~10타 적은 스코어를 냈다. 깃대를 뽑을 필요도 없어 라운드 시간이 3시간15분 정도에 불과했다.



홀 크기를 늘리자는 주장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20세기 초반의 프로골퍼 진 사라센은 “홀의 직경을 8인치로 늘리자”고 했다. 조그만 몸으로 장타를 친 그는 퍼트로 먹고사는 선수들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퍼트 무용론도 나왔다. 20세기 중반 벤 호건 등 샷에 비해 퍼트가 별로였던 일부 선수들은 “홀을 아예 없애 그린을 양궁 과녁처럼 만들고 얼마나 가까이 붙였느냐에 따라 점수를 매기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도 퍼트 무용론은 전통이 깊다. 한국의 첫 골프코스인 효창원 골프장(1921년 정식 개장)에서 일본인들은 그린에 올라가면 그냥 공을 집어 다음 홀로 갔다. 퍼트는 무사도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홀의 크기를 늘려 퍼트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자는 주장은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린은 골프의 심장이며, 퍼트를 빼고는 골프를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골프는 티잉 그라운드가 아니라 홀에서 시작된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드라이버가 아니라 퍼터가 골프를 만들었다.



한국의 대표적 코스 설계가 송호씨는 “롱게임은 2차원적이지만 땅의 굴곡까지 감안해야 하는 쇼트게임은 3차원적이다. 그린에서 창의력의 우열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타이거 우즈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장비가 좋아져 롱샷의 편차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그린은 앞으로 더욱 중요한 승부처가 될 것이다. 앞으로 기술이 발달해도 스크린 골프가 골프를 대체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그린 때문이라고 기자는 본다. 오히려 홀의 크기를 줄이자는 의견도 나온다. 최경주 등 일부 선수들은 “샷 거리가 늘어나 전장이 짧은 전통 있는 골프코스들이 무력화되어 가는데 홀 크기가 줄면 골프의 매력이 유지된다”고 했다.



홀이 커져 생길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전이 사라지는 것이다. 골프는 어려우니까, 평생 정복할 수 없으니까 기를 쓰고 하는 거다. 홀이 커져 골프에서 번뇌가 사라지면 골퍼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그 대상은 알코올도, 도박도 될 수 있다. 결국 더 많은 번뇌가 생길 것으로 기자는 본다. 기자는 홀이 큰 골프코스에서 친 그날 라운드의 스코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호준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