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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뉴 노멀’ 이 절실한 일본

중앙일보 2011.03.25 00:22 종합 35면 지면보기






유재하
UCO마케팅그룹 대표이사




본 지면을 통해 사하라 사막개미의 내비게이션 기능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독일 울름대학 연구팀의 관찰을 통해 발표된 내용은 이렇다. 사하라 사막의 개미들이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거리는 집에서 200m 정도. 손톱만 한 개미에게는 엄청난 거리다. 그런데 사막의 모래 위를 헤매다 먹잇감을 찾은 개미는 온 길을 계산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집까지 찾아간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사하라 개미는 이동할 때 자신의 걸음 수를 센다는 것이 연구팀의 추측이었다. 개미들은 머릿속으로 만보계를 사용해 집으로 틀림없이 찾아간다는 것이고, 그것을 사막개미의 내비게이션이라고 했다.



 오늘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진행된 실험 이야기를 해야겠다. 연구팀은 개미의 다리에 털로 만든 인공다리를 길게 덧댄 개미와 다리 끝을 1mm 정도 제거한 두 종류의 개미들을 통해 집을 찾아가도록 실험했다. 그 결과 털을 붙여 다리가 길어진 개미는 집을 지나쳐 50%나 더 멀리 갔으며, 다리가 짧아진 개미는 50% 정도 짧게 이동했으므로 집 찾기에 실패했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개미의 신경계에는 마치 만보계 같은 시스템이 장착되었다고 해석했다. 말하자면 개미는 신경계에 저장된 집 찾기 매뉴얼대로 움직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알게 모르게 뇌 속에 저장된 매뉴얼대로 움직여지고 판단하는 건 아닐까.



‘기존 질서’라는 이름의 매뉴얼을 따르면 익숙하니까, 편하니까 때로는 면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매뉴얼은 위기를 만났을 때 제 구실을 못 하게 되기도 한다. 다리가 길어지거나 짧아진 개미들이 기존의 걸음 방식 기준으로는 결국 제 집을 못 찾았던 것처럼. 이제 예측 불가능의 오늘날은 개미에게도 인간에게도 새로운 기준, 즉 뉴 노멀(New normal)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뉴 노멀’이란 올드 노멀(기존 질서) 속에서 생겨난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글로벌 기준’을 표현한 것으로 경제학자들에게서 시작된 말이다.



 벌써 2주일째가 되는 동일본 대지진 사태를 보면서 세계는 일본에서 기존과는 다른 뉴 노멀의 필요성을 발견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미디어는 사태 초기엔 세계 최고의 지진 위기관리시스템 작동을 기대했고, 일본인들의 침착함과 훈련된 대비 태도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간 나오토 정권의 초기 대응 실패와 우왕좌왕 때문에 정국을 혼란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평가다. 정치와 사회 곳곳에서 정교한 매뉴얼로 고품위 질서생활을 한다고 생각한 기존 관념에 틈이 생긴 것이고, 이 틈은 35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에게서 최대로 확대되었다. 대피소 생활을 하는 상당수는 아직도 냉랭한 학교 강당에서 차가운 주먹밥 두 개로 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노약자들은 약품을 구하지 못해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사망자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넘쳐난다는 그 많은 구호품은 왜 피난처에 닿지 못하는 것일까. 일본이 소위 매뉴얼 기준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간차량이 긴급통행허가증을 받으려면 해당 경찰서에 직접 가서 수속을 밟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구호물자와 유류차량은 며칠씩 발이 묶여야 했다. 실종자 수색을 위한 구조견 파견은 ‘광견병 청정지역’이라서 한 마리 외에는 거부됐고, 외국 구호팀 중 의사가 있자 ‘외국인의 의료행위 불가’라는 기준 때문에 입국이 지연됐다고 한다. 이쯤 되면 매뉴얼 의존 시스템은 살리는 기준이 아니라 죽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2차 재난이라 말하는 피난처의 불행은 매뉴얼이라는 기준에 얽매여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관료주의가 빚어낸 비극이다.



일본에는 매뉴얼 세대라는 말이 있다. 매뉴얼에 따라 조작해야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자율성과 판단력을 잃어버린 채 비슷한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일본은 기존 매뉴얼을 뛰어넘는 창의적이고 유연한 새로운 기준인 뉴 노멀이 절실한 때다. 그래야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열정과 아이디어가 솟아날 것이며 앞으로도 세계 경제 대국의 위상을 지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위기대처에 대한 노멀(기준)이 반듯했던가. 그것을 바탕으로 뉴 노멀(새로운 기준)로 진화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정치 리더들이 특히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다.



유재하 UCO마케팅그룹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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