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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 아시아에서는 이미 ‘한반’ 이 품질보증서

중앙일보 2011.03.22 00:21 경제 2면 지면보기



(4) 교역 1조 달러 신수출 시대 열자





한국의 ‘미(美·beauty)산업’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한국산 패션과 화장품, 성형시술은 아시아권의 명품으로 인정받으면서 매출이 급증하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서구권이 독차지했던 뷰티시장에 한국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전문가들은 뷰티산업이 교역 1조 달러 시대를 열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 중국 상하이의 이름난 상권인 민항취 지역의 유명 패션 상가 ‘다퉁양(大通陽)’. 이곳에선 한글 간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1층의 화장품 가게엔 ‘한국 화장품’, 2층의 네일숍엔 ‘신부 화장’이라고 쓰여 있다. 이 상가는 지난해 5월 4층 매장 전체를 ‘한품성(韓品城·한국제품 코너)’으로 꾸몄다. 매장은 한국에서 수입한 보세 의류를 취급하는 가게들로 꽉 채워져 있다. 대부분 ‘언니야’ ‘서울패션’같이 한글로 된 간판을 달고 있다. “사실 다 동대문 옷은 아니고, 중국 옷도 섞여 있어요. 한국 옷이라면 더 좋아하니까 간판이나 상표에 한글을 쓰는 거죠.” 8개월째 장사를 하고 있는 중국동포 이화(29)씨는 “중국 사람들은 한국 옷은 보세라도 디자인과 소재가 좋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2. 올해 초 서울 소공동 롯데면세점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 야마다 도모에(20·여)는 면세점을 들어서자마자 한국 화장품 코너를 찾았다. 그가 구입한 것은 BB크림. 한국 방문 기념으로 한국 BB크림과 마스크팩을 사 가겠다고 친구들에게 약속했다. 이 면세점에 입점된 ‘크레이지 몽키’라는 국내 브랜드는 이 매장에서 BB크림과 마스크팩만으로 지난해 11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야마다는 “한국 화장품은 품질 좋기로 일본에서 유명하다”고 말했다.









중국 상하이 둥팡상샤(東方商厦) 백화점 안에 있는 LG생활건강 ‘후’ 매장에서 한 중국인 여성 고객이 화장서비스를 받고 있다. 이 백화점은 상하이 상권의 중심지 난징동루에 위치해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의 패션과 화장품이 아시아를 달구고 있다. 오래된 현상이 아니다. 불과 5년 사이에 달라진 위상이다. 중국 여성들은 ‘한반(韓版·한국제품)’이란 단어를 품질 보증서처럼 여긴다. 일본 여성들은 “한국은 화장품이 좋아 여자들이 예쁘다”고 말한다. 한때 우리도 ‘이탈리아제 패션’ ‘프랑스제 화장품’이라면 사족을 못 썼었다. 이제는 한국제가 아시아에서 비슷한 위상으로 올라서고 있다. 세계 패션 시장은 1조 달러(약 1120조원), 세계 화장품 시장은 2300억 달러(약 260조원) 규모다. 이 거대한 ‘미(美)산업’ 시장을 한국이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한반(韓版)’. 한국어로 읽으면 한판. 한국에서 만든 제품이란 뜻이다.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타오바오에선 지난달 20일 하루에만 38만여 명이 이 단어를 검색했다. 인기 검색어 3위다. 한반 의류, 한국 외투 같은 단어를 합치면 한국산 의류를 검색한 사람이 120만 명이 넘는다. 한국 옷을 사겠다는 네티즌이 이렇게 많은 것이다. 한국 온라인 쇼핑몰 업체 에이컴메이트는 이 인기 덕에 승승장구하고 있다. 중국인 소비자와 한국 보세 쇼핑몰들을 연결시켜 주는 중국 내 사이트 ‘제이미닷컴’을 통해 지난해 2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007년 여름 문을 열고 3년 반 만에 거둔 성과다.



 이런 인기에는 한류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기본은 품질이다. 꼼꼼한 바느질, 질 좋은 소재에 발 빠른 제품화가 경쟁력의 바탕이다. 에이컴메이트 강철용 대표는 “소재와 색감도 좋지만 무엇보다 유행하는 옷을 하루 이틀 만에 제품화하는 스피드가 한국 패션의 경쟁력”이라며 “특히 동대문 일대엔 30~40년씩 봉제에 매달려온 숙련공이 많아 봉제 품질이 세계적”이라고 말했다.



 성공적인 중국 패션시장 진출 사례로 꼽히는 의류업체 이랜드. 이 회사는 지난해 중국에서 1조2000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2005년 1300여억원에 불과했던 중국 매출이 5년 새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랜드 중국법인의 김만수 경영기획본부장은 “한국식의 빠른 생산 시스템과 철저한 디자인 현지화가 성공의 열쇠”라며 “한국 제품이어서 잘 팔리는 게 아니라 제품이 좋아 한국 옷을 찾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원산지의 이미지 때문에 제품이 좋아 보이는 ‘원산지 효과’가 아니라 제품이 좋으니 원산지의 문화·산업 수준에 믿음을 갖게 되는 ‘역원산지 효과’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김난도 교수는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면 제품을 만든 나라의 문화 수준이 높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역원산지 효과라고 한다”며 “패션·화장품 제품의 수출 양상에서 이런 역원산지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 ‘미산업’의 경쟁력을 입증하는 증거는 ‘역수출’이다. 유럽 패션 브랜드를 라이선스로 들여온 국내 업체들이 우리나라에서 제품을 만들어 유럽 본사로 역수출하는 것이다. 국내 디자인과 제품력이 본사를 능가한다는 것을 인정받은 셈이다. LG패션의 라푸마가 대표적인 경우다. 유아복 업체 이에프이는 프랑스 브랜드 ‘압소바’를 국내에서 생산해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미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 배경으로 좁은 시장과 까다로운 소비자를 꼽는다. 내수 시장이 작아 경쟁은 치열한데, 여성 소비자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아 아무 제품이나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로도 지적되는 외모 지상주의가 ‘미산업’에는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LG생활건강 성유진 과장은 “한국 여성들이 피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중국·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며 “한국 여성의 피부 관리법이나 화장법을 따라 하려는 아시아인들이 한국 화장품 브랜드의 주요 고객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미산업’이 교역 1조 달러 시대의 새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서울대 경영학과 박남규 교수는 ‘미산업’을 ‘색깔 있는 반도체’라고 명명했다. 경쟁력 있는 ‘미산업’ 브랜드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이유다. 박 교수는 “기술뿐 아니라 디자인과 문화적 배경까지 뒷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산업’ 경쟁력은 선진국의 척도”라며 “세분화된 경쟁력과 스피드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데 한국은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강점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자카르타(인도네시아)·싱가포르·호찌민(베트남)·상하이·항저우(중국)=최지영·이수기·임미진·김진경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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