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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기『황강에서…』쓴 뒤 40대 이후 삶 씁쓸

중앙선데이 2011.03.20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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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80년대 <2> - 해양문학 개척자 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



천금성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을 거의 바다 위에서만 생활한 특이한 경력의 소설가였다. 육지에서보다 바다에서 산 시간이 더 많다 할 정도였는데도 그는 틈틈이 문예지 등에 바다에서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78년 초가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저녁의 퇴근 무렵 천금성이 같은 연배 문인 두어 명과 함께 직장으로 찾아왔다. ‘뱃사람’에 대한 나의 선입감을 깨기라도 하듯 그는 말쑥한 정장에 코트를 걸쳤고 007가방을 들고 있었다. 수인사가 끝나고 나서 그는 가방을 슬쩍 열어 보였는데 그 속에는 1만원권 다발이 가득 들어있었다. “여러 달 외항선 선장 일을 하며 번 돈”이라면서 “이 돈으로 오늘 마음껏 술을 마시자”고 호기를 부렸다.



술자리가 시작되자마자 천금성은 갓 나온 자신의 단편집 『허무의 바다』를 건네면서 해양문학에 대한 강한 집념을 펼쳐 보였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 같은 바다를 무대로 한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이런 집념이 얼마간 통했는지 그는 이듬해인 79년 초부터 경향신문에 첫 장편 해양소설 ‘표류도’를 연재하게 된다. 마침 나의 오랜 친구인 서양화가 김경인이 그 연재소설의 삽화를 맡게 돼 천금성의 근황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온갖 힘을 쏟아부었지만 ‘표류도’는 그다지 큰 주목을 끌지 못한 채 10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41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바다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제대 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설립한 한국원양어업기술훈련소에 입소한 것이 본격적으로 해양소설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훈련소의 어로학과를 수료하면서 갑종 2등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한 천금성은 68년 첫 인도양 항해 때 배 위에서 쓴 단편소설 ‘영해발 부근’을 69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때 그는 해양소설이라는 미개척의 분야에 꽤 자신감을 가졌던 듯 응모작에 ‘당선 소감’을 함께 써 보냈고, 당시 심사를 맡았던 김동리·황순원은 새로운 해양작가의 탄생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배를 탄 지 2년 만에 선장 자리에 오른 그는 78년까지 12년간 줄곧 외항선을 타면서 바다 체험의 폭을 넓혀갔다.



신문 연재를 끝내고 79년 말부터 잇따라 불어닥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천금성 역시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던 중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재직 중이던 허문도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얼마 전 80년 8월 중순께의 일이었다. 그 무렵 허문도는 ‘스리(3) 허(許)’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허문도는 천금성의 서울대 농대 2년 선배였고, 농대 학보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허문도의 권유로 천금성도 학보 편집에 참여했던 인연이 있었다.



허문도를 만난 천금성은 뜻밖에도 ‘전두환 장군의 전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천금성은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도 그에 뒤따를 ‘반사이익’도 염두에 뒀을 법하다.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70년대 중후반 무렵 박목월과 박재삼이 ‘육영수 전기’를 써서 각각 억대를 챙겼으리라는 풍문도 순간적으로 천금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천금성의 40대 이후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잘못된 판단이었다. 어쨌거나 그 자리에서 천금성은 허문도로부터 착수금조로 50만원을 건네받았다.









천금성씨(왼쪽)가 12.12사태후 모 공수여단장으로 재직하던 장세동 대령으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고 있다. [중앙포토]









원고지 1200장 분량의 전두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는 착수한 지 약 3개월 만인 10월 말에 완성됐고, 제5공화국이 출범하기 약 한 달 전인 81년 1월 말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천금성이 챙긴 돈은 취재 과정 중 추가로 받은 200만원과 후에 인세로 받은 700만원을 합쳐 약 1000만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시중에 깔린 책은 별로 팔리지 않아 몇 달 뒤 민정당과 평통자문회의가 1만여 권의 재고를 모두 구입해줘 그 정도의 인세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천금성의 막연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단에서는 천금성을 기피인물로 따돌렸고, 출판사나 잡지사들도 공공연히 냉대해 아무리 소설을 써도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소설가로서의 기능마저도 상실할 위기에 빠진 것이다. 자업자득이기는 했지만 5공의 권력층에 대한 천금성의 불만은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을 털어놓았고 이런 행태는 고위층에까지 전해져 특수수사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불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권력층의 판단이 작용했던지 그는 82년 문화방송의 편집위원 자리를 얻게 된다.

‘낙하산’이라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면서도 천금성은 문화방송 재직 중 전 세계 70여 개 나라를 돌며 ‘의지와 도전의 현장 오대양을 가다’라는 제목의 해양 다큐멘터리 3부작을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결국 방송을 타지 못했고 전두환이 백담사에 들어가기 직전인 88년 11월 스스로 문화방송을 물러나지만 천금성은 그 일이 문화방송 재직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문학적 재능이나 그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지 간에 천금성은 여전히 해양문학이라는 독특한 분야의 개척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학이 정치권력에 기생하거나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될 때 그 결말이 행복한 모습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천금성은 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80년대 후반 그는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나이 70에 이르러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80년대가 그에게는 ‘질곡의 터널’이었을 것이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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