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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DNA’ 대물림…교배 한 번이 다이아몬드 1캐럿 값

중앙선데이 2011.03.20 00:18 210호 20면 지면보기
경주마로서 뛰어난 성적을 올린 수말은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씨수말로 전업한다. 자마(子馬)들이 최상위 경마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면 씨수말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사진은 일본에서 열린 경마대회 장면. [중앙포토]
퀴즈 하나 풀고 시작하자. ‘인류의 제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동물 두 종류는?’
정답은 ‘말, 그리고 사람’이다. 말은 승마와 근대5종에 출전한다. 말과 사람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다.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5> 경마산업의 꽃, 경주용 씨수말


국내 최고가(40억원) 씨수말 메니피.
오늘의 주인공은 마(馬)님이시다. 600종이 넘는 말 중에서 경마용으로 개량된 품종을 서러브레드(Throughbred)라고 한다. 서러브레드 수말 중 경주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린 선수는 은퇴한 뒤 씨수말로 변신한다. 자신의 질주 DNA를 이어받은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경마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일본 등에서 씨수말의 값은 상상을 초월한다. 1회 교배료가 5억원을 넘는 말도 있다. 20세기 최고의 씨수말로 평가받는 미국의 스톰캣은 교배료만으로 한 해 700억원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명마(名馬)의 정액 한 방울은 다이아몬드 1캐럿과 맞먹는다’는 얘기가 과장이 아니다.

국내에도 한국마사회가 수입한 씨수말 14마리가 제주도 경주마목장에 있다. 마사회는 뛰어난 품종의 국산마 생산을 위해 개인 소유 농장에서 키우는 씨암말에 무료로 씨수말을 붙여 준다. 요즘은 개인 마주들이 씨수말을 수입해 돈을 받고 교배를 해 주기도 하는데 이 씨수말의 2세들이 경마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늘푸른목장 소속의 크릭캣은 국내 씨수말 중 교배료가 가장 비싸 회당 500만원 이상이다.

암말의 교배 의사를 타진하는 시정마.
봄은 짝짓기의 계절. 제철을 만나 맹활약하는 씨수말을 만나러 스포츠 오디세이가 제주도로 내려갔다.

제주도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제주경주마목장. 귀하신 몸들이 사는 곳을 둘러봤다. 마방 입구는 갖가지 꽃들로 예쁘게 단장돼 있다. 씨수말들은 고급 사료와 당근은 물론 말 전용 비타민과 홍삼에다 오메가3까지, 좋다는 건 다 먹는다. 밖으로 나가니 파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씨수말들은 축구장 크기의 초지를 하나씩 차지해 마음껏 운동하며 쾌조의 컨디션을 유지한다. 국내 최고액 씨수말인 메니피(수입 가격 40억원)도 늠름한 자태로 초원을 활보하고 있다.

말의 교배기는 3월부터 6월 말까지다. 이 기간에 씨수말이 상대하는 암말은 70마리쯤 된다. 한 번에 임신할 확률이 70% 정도고, 임신에 실패하면 다시 ‘의무방어전’을 치러야 하니 씨수말이 한 해 교배하는 횟수는 100회 남짓이다. 젊은 말은 하루 세 번, 나이든 말은 하루 두 번 합방한다.

마방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 교배소가 있다. 교배소와 마방 사이에 먼저 간 씨수말의 영령을 달래는 조그만 묘지가 조성돼 있다. 그러니 씨수말은 집과 직장, 무덤이 도보 1분 거리에 있는 셈이다. 마사회 소속 말들은 임종까지 깔끔하게 대우받지만 개인 목장에서 관리하는 씨수말은 자마(子馬)의 성적이 신통찮으면 바로 퇴출당한다. 대부분 승용마나 관상마로 팔려가지만 육용(肉用)으로 최후를 마치는 경우도 있다. 씨수말의 고기값은 조랑말(200만원)에도 못 미치는 50만∼100만원 정도다.

시정마는 교배 가능한지 떠보는 ‘애무 전문’
오후 2시 교배에 맞춰 씨암말을 태운 트럭들이 도착한다. 씨암말은 간단한 검사를 거친 뒤 교배소로 먼저 입장한다. 자신이 낳은 망아지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은데 교배 때 심리적 안정감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곧이어 시정마(始情馬)가 들어온다. 시정마는 암말이 교배할 준비가 돼 있는지를 알아보는 ‘애무 전문’ 말이다. 암말이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교배를 거부하거나, 심하면 수말을 발로 찰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정마는 암말과 체격 차이가 나는 조랑말이 맡는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앞치마를 찬다. 분위기가 무르익는 순간 교배사들이 고삐를 끌어당기자 시정마는 끌려나오면서 발길질을 하며 성질을 냈다.

씨수말과 씨암말의 교배 장면은 격렬하고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시간은 20초 안팎으로 매우 짧다. 맹수의 위협에 노출된 초식동물의 운명이다. 교배 후에는 씨수말의 몸에 남은 액체를 수거한다. 전자현미경을 통해 힘차게 움직이는 정자를 확인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현재 제주도에는 150개 정도의 민간 말목장이 있다. 대부분 씨암말과 이들이 낳은 자마를 키운다. 1년 정도 키운 말들은 경주마 훈련을 받은 뒤 2000만∼3000만원에 팔려나간다. 경주마는 만 2세가 넘어야 경주에 출전할 수 있다.

요즘 제주도에서 주목받는 곳은 씨수말 세 마리를 키우는 녹원목장이다. 수의사인 최종복 대표가 말들을 정성껏 돌보고 있다. 국회의원을 지낸 지대섭 녹원목장 회장은 올해 일본에서 씨수말 어드마이어돈(Admire Don)을 들여왔다. 일본 최상위 경마대회인 그랑프리1(G1)에서 여섯 차례나 우승한 명마다. 어드마이어돈은 1회 교배료로 200만원을 받는다.

“미국 말산업 규모 영화산업과 맞먹어”
녹원목장에 있는 씨암말 50마리 중 독보적인 존재가 월들리프레저(Worldly Pleasure)다. 이 말은 미국 경매에서 1만 달러를 주고 사왔다. 그런데 그 아들인 게임온두드(Game On Dude)가 지난 6일 G1에서 여성 기수를 태우고 우승을 차지했다. 여성이 탄 말이 G1에서 우승한 건 미국 경마 역사상 처음이다. G1에서 우승하는 순간 우승마는 1000만 달러, 그 어머니는 100만 달러로 몸값이 껑충 뛴다고 한다.

이달 중 어드마이어돈과 월들리플레저가 합방한다. 내년이면 수퍼 경주마가 탄생할 거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대섭 회장은 “말산업은 미국에서 영화산업과 맞먹을 정도의 시장 규모와 엄청난 부가가치를 갖고 있다. 뛰어난 경주마를 생산하는 게 말산업의 꽃”이라고 말했다.
사람과 말의 공통점이 또 있다.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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