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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도 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을

중앙선데이 2011.03.20 00:15 210호 5면 지면보기
3월에 눈이 내린다. 꽃이 지듯이 내리는 눈이다. 금방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눈이다. 이제 곧 사라질 운명인 고택에서, 노인은 눈처럼 가벼운 소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평생의 추억이 담긴 보금자리를 떠나기 전날 하루 동안, 한옥은 죽어가고 사람들은 사라져 가는 소멸의 시공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간단히 뛰어넘은 부부의 내밀한 대화가 오간다.

연극 ‘3월의 눈’, 20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국립극단과 함께 평생을 연기에 바쳐온 두 노배우에게 헌정된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개관공연 ‘3월의 눈’이 한국 현대연극사의 두 주역을 앞세워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아무런 갈등도 극적인 요소도 없이 생활처럼 흘러가는 80분은, 3월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어떤 것에 조용히 방점을 찍는다.

사라져가는 것은 한옥뿐이 아니다. 늘 다니던 이발소, 평생 낯익었던 마을의 풍경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요란한 카페와 상점들만 늘어간다.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 나선 관광객들로 마을은 평온을 잃은 지 오래다. 노부부의 추억이 담긴 오래된 시공간은 이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옛 모습은 ‘젊은 것들’의 취향으로 대체되어 간다. 뼈대만 남은 한옥 공간은 죽음을 저만치 앞둔 육체의 은유다. 사라진 추억의 시공과 함께 사람도 사라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들은 아낌없이 내어줄 뿐, 아무것도 탓하지 않는다.

유일한 혈육인 손자를 위해 집을 헐고 요양원으로 떠나야 하는 고뇌와 한숨이 묻어 나오는 남편 ‘장오’. 그에 비해 어쩐지 생활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고운 차림새로 한가롭게 툇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봄볕이 좋으니 문종이를 새로 바르자 재촉하는 아내 ‘이순’. 그녀는 그 남자의 ‘식스센스’다. ‘말없이 먼저 가버린’ 동반자의 영혼은 함께한 세월의 여운으로 남아 소멸해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까마득히 오래된 둘만의 추억을 꺼내어 나눈다. 산 사람들과 소통의 고리를 찾을 길 없는, 삶보다 죽음에 한 발짝 가깝게 내몰린 노년이 머무를 유일한 안식은 죽은 이와의 소통이다.

부부의 불가능한 대화를 매개하는 것은 죽은 이의 체온이 남아 있는 ‘문종이’와 ‘스웨터’. 내일이면 헐릴 집에 헌 문종이를 뜯어내고 새 문종이를 바르며 추억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소중한 추억을 누렇게 빛바랜 채로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은 마지막 의지다. 미처 다 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빨간 스웨터를 풀고 또 풀며 다시 짜는 이순은 완성할 의지가 없다. 완성을 위해선 부부가 다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순은 장오에게 “천천히, 천천히 오라”고 당부한다.

3월의 눈 속에 집이 헐리고, 추억이 헐리고, 산 사람은 다 떠나도 죽은 자는 빈터를 떠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을 간직한 서늘한 시선은 소멸의 과정까지 담담히 담아낸다. 보이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걸까. 60여 년간 지켜온 무대를 머잖아 떠나야 할 백성희(86), 장민호(87) 두 노배우가 객석을 내다보는 시선은 ‘당신들의 인생은 어떻게 사라져 가는가’ 묻는 듯하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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