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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나는 반복·반복…몽환적인 인생의 기차소리들

중앙선데이 2011.03.20 00:12 210호 22면 지면보기
일요일 밤 이슥한 시각에 작업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작은 콘서트 뒤풀이 자리에서 연주평을 나눈 인연으로 편한 친구 사이가 됐다는 심리학 교수와 첼리스트. 슈베르트풍 봉두난발 파마머리의 심리학이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 자주 만나는 사이지만 첼로는 초면이다. 귀네스 팰트로를 무척 닮은 삼십 초반의 고혹적인 여성이었다. 취향을 공유하면 참 많은 것을 뛰어넘는다. 애피타이저 격으로 한대수의 걸걸한 목소리, 레오 페레의 느릿느릿한 샹송 LP 등을 틀고 있는데 첼로가 제안을 한다. 3월 말에 열리는 통영 국제음악제에서 자신이 속한 실내악팀이 연주할 곡목을 들어보자고. 스티브 라이히(사진)의 ‘다른 기차들(Different Trains)’이었다.

詩人의 음악 읽기 스티브 라이히 ‘다른 기차들(Different Trains)’

가령 당신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조르주 브라크의 난삽한 입체파 그림들을 즐길 수 있는가. 탐구심이 발동하거나 작가 혹은 작품에 떠도는 전설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즐긴다는 문제는 꽤 다르다. 첼로가 제안한 곡이 그렇듯 쉽지 않은 음악이었다. 미국 현대음악에서 대표선수처럼 거론되는 인물이 필립 글래스와 스티브 라이히다. 둘 다 단순한 동기(모티브) 한둘을 한없이 반복하는 미니멀리즘(최소주의) 음악가다. 반복 또 반복 속에 변화는 너무도 미세하여 특별히 집중하지 않으면 포착되기도 힘들다. 글래스는 ‘쿤둔’을 포함한 여러 편의 영화음악을 만든 터라 비교적 알려졌지만 라이히의 음악은 클래식 언저리에서 꽤 서성거렸어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잘 팔리는 공지영·신경숙 소설만이 소설이 아니라 박상륭이나 정영문 같은 기이한 문학세계가 따로 있듯이.

크로노스 콰르텟이 연주하는 ‘다른 기차들’의 27분간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낭만 가곡을 즐기고 밝은 선율을 사랑하는 심리학은 개구쟁이 표정을 지으며 ‘살려줘’를 여러 번 반복했다. 전공자이자 바로 이 곡의 연주회를 앞둔 첼로는 지긋이, 그리고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지만 문제는 나였다. 농담 삼아 좀 ‘변태적 기질’의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내 경우 스티브 라이히의 현기증 나는 반복 사운드는 장갑처럼 꼭 끼는 음악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곡을 ‘즐겁다’고 말하기는 많이 망설여진다. 누군가는 라이히의 음악을 처음 듣고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다’고 했다던가. 한밤의 세 사람은 이렇게 다 달랐다.

‘다른 기차들’에는 작곡가 스스로의 술회를 통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1936년 라이히가 태어나고 곧장 부모가 이혼했는데 엄마는 로스앤젤레스에, 아빠는 뉴욕에 살았단다.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고 그 먼 거리를 오가며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아이에게 기차여행이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어린 라이히에게 엄마 찾아, 아빠 찾아 3만 리를 달리는 기차소리는 흡사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기차들’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현악 사중주가 연주를 하는 가운데 미리 녹음된 기차소리, 사이렌 소리,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육성이 음산하게 섞여 나온다. 3개의 악장에는 각각 ‘1.아메리카-전쟁 전, 2.유럽-전쟁기간, 3.전쟁 후’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집중해서 들으면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뉴욕에서 부서진 기차’ ‘독일사람들이 헝가리로 침략했어요’ 등등의 외마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재앙의 기차소리, 죽음의 기차소리, 무상함의 기차소리들. 이 곡은 ‘경이적인 독창성’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그래미상 현대음악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기차들 (Different Trains)’ 음반 표지.
스티브 라이히의 지적 편력이 흥미롭다. 그는 코넬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후에 줄리아드에서 작곡을, 그리고 이어서 아프리카 가나대학으로 유학해 타악기를 공부했다. 그에게는 철학과 음악이 이른바 초끈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유별난 체험은 이 밤의 방문객들에게도 있다. 곱게만 자랐던 심리학은 독일 유학을 떠난 뒤 13년 동안 병원 시체실에서 공장 문지기까지 별일을 다 경험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초반에 프랑스로 떠나 20대 후반에야 고국에 돌아왔다는 첼로는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한다. 그 사이 얼마나 이질적인 사람들을 만나왔을까. 우리는 모두 어쨌든, 다르게 살아왔고 다르게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다른 인생의 기차들이 한 방에 모여 앉아 깊은 봄 밤을 같이 달린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다른 걸까. 혹은 다를 수 있는 걸까. 저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기차소리. 천장의 형광등은 꺼져 있고 몇 개의 초가 작업실 안을 밝힌다. 세 사람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동그마니 모여 있는 다정한 풍경으로 보일 것이다. 혹시 예술의 무게가 각자의 인생보다 더 커서 셋의 차이는 결국 거기서 거기인 건 아닐까. 다름과 같음에 대해 어떤 해답이 내려지지는 않는다. 단지 ‘다른 기차들’을 달리게 만든 스티브 라이히를 통해 우리 생의 27분간이 제법 특별하게 느껴졌다는 것. 어쨌든 슈베르트 파마머리 정운아, 이 곡 참 심란하다는 건 인정함세.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방송 진행과 강의, 원고 집필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혼자 쓰는 널찍한 지하의 작업실 ‘줄라이홀’에서 음향과 향기와 빛깔을 만끽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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