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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상징 긴 생머리, 기존 가치에 도전한 짧은 치마

중앙선데이 2011.03.20 00:11 210호 8면 지면보기
1 1980년대 초반의 박인희 모습.2 1970년대 디스키자키 시절의 양희은. [중앙포토]
예상치 않게 후끈 달아오른 세시봉 프로그램을 보며 중년 세대들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보며 “많이 늙었다”와 “옛날 모습 그대로네”를 반복하게 되는 것처럼, 이들은 TV속 환갑 넘은 가수들과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방청객들 얼굴을 보며, 40년 전의 모습과 겹쳐 보는 시뮬레이션을 하게 된다. 테마로 대중가요사를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하며, 3월에는 바로 이들 ‘청년’ ‘청춘’이라는 말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 청춘 - 세시봉 시대의 여자들

세시봉 시대 청년들의 외모는 어땠을까. ‘긴 머리에 짧은 치마 /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 오 토요일 밤에’(김세환 ‘토요일 밤에’)의 가사처럼, 이 시대 여성들의 외모를 특징적으로 압축하는 말은 ‘긴 머리’와 ‘짧은 치마’다. 1967년 3월 디자이너 박윤정의 패션쇼에서 가수 윤복희가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온 이후 미니스커트는 급속히 전파됐다. 서양에서도 미니스커트가 처음 나온 것이 65년이고, 66년에는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 위 10㎝의 미니스커트를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으니, 우리나라의 유행도 결코 뒤진 것이 아니다.

김세환의 ‘토요일 밤에’는 73년 발표됐다. 세시봉에서 트윈폴리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 68년, 음악감상실과 라디오에 머물고 있었던 포크가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와 은희의 ‘꽃반지 끼고’ 등으로 TV 프로그램과 일간지 기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71년이니, ‘토요일 밤에’가 나온 것은 포크송이 한창 주가를 높이면서 트로트를 밀어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73년 음반을 들어보면, 기타 한 대로만 반주하며 부르는 김세환의 달착지근한 목소리에, 후렴구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의 후렴에서 윤형주의 하이 파트 목소리로 화음을 맞춘 아주 소박한 노래였다.

그런데 이미 70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에 대한 경범죄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70년 신문에는, 여자들의 미니스커트가 이미 무릎 위 20㎝에 이르고 있고, 무릎 위 17㎝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경범죄로 처벌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니 무심코 썼을 것이 분명한 이 ‘짧은 치마’란 구절도, 이 노래의 대대적 유행과 함께 철퇴를 맞을 운명이었다. 음반에서는 74년까지 이 가사 그대로였으나, 이즈음부터 TV에서는 “긴 머리에 분홍치마”로 부르고 있었다. ‘긴’ 머리와 ‘짧은’ 치마라는 절묘한 대조를 깨버린 이 졸렬한 개사에, 나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그에 비해 여자들의 ‘긴 머리’는 그다지 통제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 눈에는 여자들의 긴 머리 역시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긴 머리는 분명, 파마도 하지 않은 채 풀어헤친 긴 생머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풀어헤친 긴 생머리는 우리 문화에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에게 이 헤어스타일은 죄인이나 귀신의 머리 모양으로 인식되었다. 우리 할머니도 “에미 애비가 죽었냐, 머리 꼴이 그게 뭐냐?”고 늘 나무라셨다. 50~60년대에도 오드리 헵번이나 메릴린 먼로처럼 컬을 넣은 단발 스타일이 새로운 유행이었다.

그런데 청년문화 붐이 일어나면서 어른들 눈에 거슬리는 두 헤어스타일이 유행했으니, 긴 생머리와 남자처럼 짧게 자른 쇼트커트다. 그것도 미니스커트, 핫팬츠, 청바지, 나팔바지 같은 옷들과 함께이니 더욱 목불인견이라 했을 것이다. 73년 치안국에서는 남자 머리가 여자 쇼트커트보다 길면 장발로 규정한다는 측정 불가능한 기준까지 발표했으니, 여자와 남자의 머리 길이가 뒤바뀌는 현상이 기성세대에게는 얼마나 못 견딜 노릇이었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70년대 포크의 대표적인 두 여가수인 박인희, 양희은의 헤어스타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박인희는 가운데 가르마에 긴 생머리였고, 양희은은 남자처럼 짧은 쇼트커트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기성세대 마음에 들건 말건, 긴 생머리에 대한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은 노래에서도 계속 발견된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 라일락 꽃 향기 흩날리던 날 /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윤형주 ‘우리들의 이야기’, 1972)에서도, 대학 교정에서 만난 그녀의 머리는 ‘긴 머리’이다. 몇 년 뒤에 나온 둘다섯의 ‘긴 머리 소녀’쯤에 이르면 이제 다소 식상하다.

짧은 치마가 기성의 윤리에 도전하는 도발성의 상징이라면, 긴 생머리는 거짓과 치장 없는 순수의 상징이다. 대량살상을 동반한 전쟁들의 주역인 기성세대에게 반기를 든 미국과 서구의 청년세대, 그리고 식민지와 6.25전쟁을 통과한 찌들고 비겁하고 무능한 기성세대에게 반기를 든 한국의 청년세대, 이들에게 솔직한 도발성과 거짓과 꾸밈 없는 순수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였던 셈이다.

노래 곳곳에는 이런 가치들이 넘쳐흐른다.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비가 좋아 빗속을 거닐었고 눈이 좋아 눈길을 걸었’으니, 이들이 사랑한 것은 이 세상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자연이었다. 이는 전후 복구를 하고 ‘잘살아 보세’를 외쳤던 기성세대의 가치와는 매우 다른 질의 것이었다.

그래서 “아하 나는 살겠네 태양만 비친다면”(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이라거나, 맑은 동해바다에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찾아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마음(송창식 ‘고래사냥’), “나는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 / 내 가난한 마음속에 찾아오리라”(양희은 ‘가난한 마음’)는 구절들이, 당시의 많은 청년들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시 모든 청년의 것은 아니었을 수 있다. “라일락 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만난 그들은 모두 대학생이었다. 이 청년문화의 중심은 대학생과 그들을 동경하던 인문계 고등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청년문화와 포크송은 기성세대의 가요에 비해 크게 파격적일 수는 있었으나, 다른 한편 남진과 나훈아의 노래에 비해 덜 대중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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