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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중앙선데이 2011.03.19 23:59 210호 10면 지면보기
나는 인사성은 밝은 편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내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말을 못한다.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설령 그쪽에서 좋다고 해도, 사실은 싫은데 거절을 못 하는 성품이라 억지로 응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연한 고민까지 사서 하느라 결국 못 만나는 것이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학창시절 그렇게 친했던 친구와 한 해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사정도 따지고 보면 그런 쓸모 없는 걱정과 고민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자주 만나는 친구가 있는데 학창시절에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동민이다. 동민은 나와는 우연이 깊은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때는 한 달에 두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다. 그때 동민은 “우리 혹시 전생에 부부나 연인이었나 보다”라며 낄낄거렸다. 한번은 부산으로 출장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나기도 했고, 교보문고 시집 코너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허수경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동민이 맞은편에서 어, 또 만났네, 라는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전생의 마누라처럼 말이다.

우리는 반가움을 과장한 악수를 하고, 근황을 묻고, 머리숱과 아랫배 흉을 보고, “다음에 만나서 꼭 소주 한잔하자”는 약속을 다짐처럼 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동민과 소주를 마신 적이 없다. 따로 연락해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쪽에서 전화를 걸면 쉽게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각해본다. 요즘 그 친구가 바쁘진 않을까? 회사에 중요한 업무가 있을지도 모르고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할 사정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동민이 “무슨 일이라도 있어?”하고 묻는다면 나는 몹시 곤란해질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꼭 지금이 아니래도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다음에 만나지라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언제든 만날 수 있다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오히려 만남을 지연시키고 방해한다. 다음에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면 결국 만나지 못한다. 가령 이 대리는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동료인데, 복도에서 만나면 나는 그에게 이런 인사를 건넸다. “언제 한번 점심이나 같이하시죠.” 정작 그와 점심을 함께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약속도 없으면서 내가 차일피일 미뤘기 때문이다. 가끔 로비에서 마주치면 나는 또 “아, 언제 한번 점심 같이해야 하는데”라며 뻔뻔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이 대리는 빙긋 웃기만 했다. 한번은 내가 그런 인사를 했더니, 그는 장난스레 웃으며 “꼭 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또 미루고 미루었다. 어느 날 이 대리에게서 e-메일을 받았다. 제목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였다.

지난주 나는 동민을 만났다. 나는 퇴근하는 길이었고 친구는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약속시간에 늦었는지 동민의 표정이 바빠 보여 짧은 인사만 나누었다. 나는 돌아서는 동민에게 “담엔 정말 꼭 소주 한잔하자. 내가 전화할게”라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펴 전화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몇 걸음 걷던 동민이 돌아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잔할래. 사실 운동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하루 빠져도 돼.”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 묻어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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