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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일류, 정치는 삼류

중앙선데이 2011.03.19 23:55 210호 35면 지면보기
동일본 대지진 보도를 접하면서 일본 국민의 절제와 인내심, 배려, 질서의식에 전 세계가 감탄하고 있다.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그렇다면 일본 국민이 ‘일류 국민’의 품격을 갖춘 원동력은 무엇일까. 집단의 규범·규율 준수를 중시하는 교육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고, 평상시 재해대응 훈련이 주효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미증유의 대형 참사에 이재민들이 저토록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개인적 요인으로 한정해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국가에 대한 신뢰 없이 피난소 생활의 추위와 배고픔·공포를 감내할 수는 없을 것이다. NHK방송 센다이지국의 보도에 따르면 시 교외의 한 피난처에선 4인 가족의 하루치 식량으로 작은 빵 4개, 비스킷 한 봉지, 종이컵 4잔의 물이 주어진다. 아이를 가진 한 어머니는 그마저 아이를 위해 아껴둔다. 갓난아이의 우유와 기저귀는 동이 난 상태다. 환자가 속출해도 약이 없다. 그럼에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아무도 소리 지르지 않는다. 나라가 결국은 잘해낼 거라고 믿고 있는 거다. 일본 국민의 행동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부 매스컴과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국민 자질론’에는 함정이 있다. 국가 재난이 발생할 때 국민 개개인에게 그 피해와 책임을 전가하는 이데올로기로 역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국가와 공무원을 신뢰하는 근거는 뭘까. 1985년 멕시코 대지진을 조사하고 돌아온 오카베 게이조 전 도쿄대 교수에 따르면 멕시코에선 관공서·학교 같은 공공건물이 주로 붕괴되거나 대파됐다. 대지진이라는 천재(天災)에 ‘부정부패’라는 관재(官災)가 겹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적고 책임감이 남다르다. 우리는 지진 피해지역을 비추는 TV의 참담한 영상 속에서 공공건물들이 당당하게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이 학교·관공서 건물로 대피해서 목숨을 건졌다. 피해마을에서 마지막까지 대피 안내방송을 하다가 정작 자신은 쓰나미에 희생당한 미혼의 여성 공무원, 아내가 실종됐음에도 단 하루 휴식도 없이 구조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50대 공무원…. 일본 국민의 의연함 뒤에는 묵묵히 맡은 일을 완수하는 공무원들이 버티고 있다.

그러나 정치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국민과 공무원은 일류인데 정치는 아무래도 삼류 같다. 간 나오토 정권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의혹에 확신이 더해진다. 간 정권의 우왕좌왕 때문에 사태가 수습되기는커녕 혼란만 커지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대책이 미비한 책임을 ‘도쿄전력’에 전가하더니 방사능 유출 위험성에 대해서는 매일 말이 바뀐다. 이재민의 긴급구호를 기초자치단체에 맡겨버리고, 현상조차 파악 못한 채 오직 국민의 인내만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일본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의 인내가 아니라 정치권의 리더십일지 모른다.

단적으로 연료 부족 문제를 보면 간 내각과 민주당의 무능을 짐작할 수 있다. 수송차량에 쓸 휘발유가 없어 물과 식품·약품을 배급할 수 없고, 난방용 등유가 없어 이재민들은 혹한에 떤다. 병약자는 죽어가고, 신생아를 비롯한 어린이들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 그럼에도 간 내각은 늑장대응을 계속하고 있다. 과감한 선제조치 대신 국민의 내핍만 요구하는 것이다.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도 이해하기 어렵다. 연료부족 대책을 묻는 질문에 “절박한 상황은 아니다”며 “연료 사재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정유사들에 사흘 사용량에 해당하는 비축분을 풀라고 요구한 게 고작이다. 정부 비축분을 재빨리 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뿐인가. 참사 후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재해복구비용을 넣은 추경예산안을 아직도 편성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아동수당, 고교 수업료 무상화, 고속도로 무료화 등 민주당의 선심성 간판정책에 드는 예산을 폐지하거나 삭감하면 당장이라도 피해복구비를 대폭 늘린 추경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류 국민과 삼류 정치가 공존하는 나라, 일본의 현주소다.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일류 국민’의 품격 못지않게 ‘삼류정치’의 폐해를 깨우쳐야 하는 게 우리의 몫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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