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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상 수상의 숨은 힘, 할리우드 네트워크

중앙선데이 2011.03.19 23:40 210호 32면 지면보기
영화 ‘블랙스완’에서 흑조로 변신한 내털리 포트먼. [중앙포토]
유대인. 숫자로는 겨우 1600만 명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인류사와 세계경영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역사를 바꾼 신대륙 발견과 자본주의·공산주의, 국제금융, 핵무기, 엔터테인먼트, 정보통신 등 굵직굵직한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는 항상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소리 없이 지구촌을 좌지우지하는 집단 가운데 하나다. 국제질서의 큰 판을 짜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필두로 오스카상을 거머쥔 29세의 여배우 내털리 포트먼, 반(反)시온주의 아나키스트인 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미국은 하드파워인 군사력에다 유대인이 주도하는 소프트파워를 결합시켜 누구도 대적하기 힘든 초강대국으로 군림한다. 중앙SUNDAY는 창간 4주년을 맞아 유대인의 활약상과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한다. 유대인이야말로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고 협력할 대상이라고 판단해서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내털리 포트먼과 블랙 스완

나탈리 헤르슐라그(Natalie Hershlag)는 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내털리 포트먼의 본명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뤼크 베송은 1994년 ‘레옹(L<00E9>on)’이라는 필름 누아르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이 영화로 베송은 일약 거장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틸드 역을 맡아 주연인 장 르노보다 더 인상적인 모습을 남긴 13세의 깜찍한 소녀가 바로 포트먼이다. 이제 그녀는 농염한 여인으로 변신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포트먼은 8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부모 가계 모두 동유럽계 유대인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함을 자랑하던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하버드에서 정신분석학을 전공했고 2006년엔 컬럼비아대에서 국제테러 강의를 했다. 외국어에도 소질이 많아 영화 ‘레옹’에서 보여준 프랑스어 외에도 일본어·독일어·아랍어를 구사한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여성이다. 그래도 그녀는 입만 열면 ‘학자보다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포트먼은 ‘레옹’ 이후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32편의 장·단편 영화에 출연했다. 97년엔 연극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 주연을 맡았다. 2002년부터 각종 영화제의 수상자 후보로 지명돼 3개의 여우조연상과 2개의 주연상을 받았다. 올해엔 ‘블랙스완’으로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등 두 개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의 상을 수상하면서 완숙한 연기자의 반열에 올랐다.

‘블랙스완’에서는 현재 포트먼 자신의 사생활과 유사한 상황의 발레리나 역을 맡았다. 영화평은 평론가의 몫이지만 내가 보기에 포트먼의 연기 가운데 압권은 ‘몰입’이다. ‘니나’라는 한 발레리나가 안무가와 사랑에 빠져 복합적인 심리상태를 이어가는 완벽에 가까운 연기, 그것이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물론 프랑스가 자랑하는 성격 배우인 뱅상 카셀을 위시한 발군의 조연배우들도 포트먼의 연기력을 보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포트먼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성격 변화를 잘 보여주었다. 때로는 청순한 백조, 때로는 관능적인 흑조, 그리고 정신분열과 약간의 스릴러적 분위기 등 그녀의 혼신을 다한 연기 덕에 영화 관객들의 집중력은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키 1m68㎝인 포트먼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말자. 다만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할리우드 영화계는 사실상 유대인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아성이다. 영화산업 초기에 유대인 영화사 사주들은 영화가 장기적으로 상업성이 무궁무진한 오락상품이 될 것임을 간파했다. 그들의 예견대로 영화는 20세기 이후 독보적인 대중문화산업으로 발전됐다. 미국 영화계의 유대인 종사자 비율은 분야별로 50% 선을 넘나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제작자·감독·배우, 시나리오 작가, 캐스팅 담당, 음악 작곡가와 의상·소도구 담당 가운데 유대인 숫자는 엄청나다. 이들 모두는 똘똘 뭉쳐서 일한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동료 유대인들을 밀어준다. 이를 위해서 유대인이 포진하고 있는 주요 언론매체도 동원된다. 따라서 비슷한 수준의 연기자라면 유대인이 응당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밖에 없다.

영화제 수상자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이런 현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폴란드계 유대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2002년에 만든 ‘피아니스트’에 출연한 후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폴란드계 유대인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사례를 보자. 브로디는 원래 89년 영화계에 데뷔해 10여 년간 단역을 전전했다. 영화에서 빛을 보지 못하자 한때 뮤지컬 배우로 변신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다가 ‘피아니스트’의 주역으로 발탁돼 일약 중견배우 그룹에 끼는 행운을 얻었다. 브로디의 연기가 결코 수준 이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연기력을 자랑하는 수상 후보자도 적잖았다는 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포트먼은 분명 연기력 측면에서 브로디보다는 앞선다. 그러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경쟁후보 가운데 절정의 연기력을 가진 다른 여배우 두 명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나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블랙스완’의 감독도 포트먼의 하버드대 선배이며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인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였다.



박재선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외교부 구주국장과 주세네갈 대사, 주보스턴 총영사, 주모로코 대사 등을 역임했다. 유대인과 중동에 관한 글을 많이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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