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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김정기 교수 “폐쇄적 민족주의는 벗자”

중앙일보 2011.03.19 03:06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동일본 대지진의 수습 과정에서 한·일 관계가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진정한 벗 아닌가. 사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과 일본에는 이미 마음을 열고 상대국의 가치를 인정한 인물들이 많았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대다수 일본인이 한국을 업수이 여기던 시절, 조선 도자기를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일본에 설파했다. 한국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려던 그의 노력은 한·일 양국에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일 소통을 연구하는 학자

 김정기(71)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부)는 이런 한·일 관계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일본정치 커뮤니케이션’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라는 책도 썼다. 최근에는 『미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내, ‘미학(美學) 커뮤니케이션’으로 관심 분야를 넓히고 있다. 야나기 등 한국의 아름다움을 외부에 알린 외국인들, 그리고 그들의 미학관을 통해서 본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책이다. 그를 서울 이문동 서재에서 만났다.















●일본에 대재앙이 터졌다.



 “너무 큰 비극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한·일 관계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현시점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을 적극 돕는 것은 참 바람직하다. 일본인들 사이에 ‘한국은 역시 마음이 아름다운 나라, 도자기 같은 나라’라는 마음이 확산됐으면 좋겠다.”



●『미의 나라 조선』을 쓴 동기는 그런 의미인가.



 “지난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계기로 우리가 자신을 되돌아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야나기가 조선 미의 본질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한국 사람인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지 않겠나.”



 그는 책에서 야나기, 그리고 도자기 수집가인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1884~1964),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9) 형제, 주한 미국 대사관 외교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1922~88)을 다뤘다. 이들은 조선 도자기를 대량 수집해, 자기 나라에 가져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 대해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했다’는 비판도 있지 않나.



 “한국에 있는 고분을 도굴하면서까지 문화재를 훔쳐간 사람들을 ‘문화재 약탈꾼’으로 부르는 것은 옳다. 하지만 자신의 돈으로 도자기를 구입한, 선의의 수집가와 연구자들까지 싸잡아 비방해선 안 된다.”



●야나기나 헨더슨은 선의의 수집가였단 말인가.



 “그렇다. 야나기는 조선 도자기에 대해 ‘세계 예술 중 으뜸’이라고 찬사했다. 헨더슨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떤 민족보다도 태생적으로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글로 남겼다.”



●야나기를 ‘일제시대 문화정치의 협력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과 다르다. 당시 일본 주류 사회에선 조선을 ‘자치가 불가능한 나라’로 보았다. 그래야 식민 지배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었으니까. 당시 일본 미술사학의 일인자였던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같은 사람은 조선의 문화를 아주 형편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야나기는 이런 시각의 정반대 입장에 있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의 평가는 어떤 것이었나.



 “그가 볼 때 조선 미술의 아름다움은 ‘생활의 미’였다. 조선 도자기는 감상용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여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착안해 야나기는 이른바 ‘민예(民藝) 이론’을 주장했다. 민중을 위한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헨더슨도 야나기의 미학을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왜 비판받게 된 것인가.



 “한국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당시의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 야나기는, 65년 한·일 수교 이후 한·일 간의 유착에 대한 반감이 팽배할 때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헨더슨에 대한 비판은 74년에 원로 국사학자가 제기했다. ‘헨더슨이 외교관 특권을 이용해 문화재를 불법 반출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헨더슨은 미국에서 열릴 예정이던 ‘프레이저 인권청문회’ 증언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유신시대의 인권 유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 한국 정부가 청문회를 앞두고서 헨더슨을 흠집 내려고 급조한 것이었다.”



●야나기는 어떻게 조선 도자에 관심을 갖게 됐나.



 “그걸 설명하려면 아사카와 형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형제는 원래 조각가들이다. 야나기보다 먼저 한국에 왔다가 조선의 청화백자와 분청사기를 보고 조선 도자기에 반하게 됐다. 그런데 1914년 9월 형인 노리타카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일본으로 야나기를 만나러 갔다. 그때 조선 청화백자 하나를 선물로 가져갔다. 야나기도 청화백자를 보고선 조선 도자에 빠져들었다.”



●야나기가 로댕 작품도 가지고 있었나.



 “그렇다. 야나기는 당시 서구 천재 예술가들의 미술을 일본에 도입하고 있었다. 로댕과도 교류를 했고, 그의 작품도 몇 점 가지고 있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것이었다.”



 청화백자를 접한 야나기는 2년 뒤인 1916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조선 도자에 심취해 연구·수집을 시작했다. 얼마 뒤인 1920년에 일본 잡지에 ‘조선 도자기 특집’ 글을 냈다. 일본 안에서 한국 도자기의 인기가 올라갔다. ‘문화재 약탈꾼’들도 야나기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게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까.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 등은 자신이 수집한 도자기로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 미술관’을 열었다. 36년에는 도쿄에 일본 민예관을 개관했다. 일본 민예관은 공익 법인의 소유이며, 지난해에는 ‘조선 도자: 야나기 무네요시 사후 50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민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도자 600여 점 중 270점을 전시했다.



●야나기의 미학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런가.



 “한국인들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던 한국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점이 한국 사회에선 불편했던 것 같다. 조선민족미술관에 있던 도자기들은 한국전쟁 통에 일부 없어졌지만, 아직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제대로 전시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됐는데, 우리 스스로 ‘식민사관’의 덫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양국이 대등하게 협력해야 한다’고들 하는 마당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야나기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김 교수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도쿄 일본민예관의 학예부장,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의 연구원, 헨더슨의 수집품이 소장돼 있는 미국 하버드대 아서 새클러 박물관의 동양미술부장을 만났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오랫동안 헨더슨과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도 만났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 등 국내 전문가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김 교수는 헨더슨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87년 미국에서 그를 만났다. 헨더슨이 숨진 뒤 그의 아내가 수집품을 하버드대에 기증했다. 아내는 독일 예술전문학교 출신의 조각가로, 남편과 함께 수집 활동을 했다. 그런데 헨더슨의 소장품에 대해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



●외교관 신분인 헨더슨이 국보급 문화재를 어떻게 수집한 것인가.



 “수집품이 국보급이란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수집품 중 국보급은 하나도 없다. 고려청자는 두어 개 있는데, 전부 깨진 것들이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도 수집했지만, 60년대에 신라토기나 가야토기는 별로 값어치를 쳐주지 않았다. 하버드대 로버트 마우리 교수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헨더슨은 소장 가치보다는 연구 가치를 보고서 문화재를 모았다. 도편 컬렉션이 대표적인 예다.”



●도편 컬렉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1920년대와 30년대에 전국 678개의 가마터에서 도자기 파편 900여 개를 수집했다. 멀쩡한 그릇이 아니고, 파편일 뿐이니 연구 가치만 있지, 소장 가치는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헨더슨이 300만 엔에 사들여 80년 미국으로 가져왔다.”



●아사카와 형제의 수집품이 헨더슨에게 이어졌다는 게 흥미롭다.



 “헨더슨의 친한 친구 중에 에드워드 자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라는, 컬럼비아대 일본문학 교수가 있다.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설국(雪國)』을 영어로 번역한 학자다. 일본에서 생활하다 일본에서 죽었다. 이 사람이 79년 일본 골동품상에서 도편 컬렉션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헨더슨에게 알려줘 사게 한 것이다.”



 김 교수는 헨더슨이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 일본 골동품상이 쓴 도편 리스트 등을 꺼내 보여줬다. 김 교수의 설명을 듣자니, 이들이 ‘한국 미술을 사랑한 친한파였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61년 일본에서 숨졌고, 동생 다쿠미는 39년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 현재 서울 망우리에 묻혀 있다. 다쿠미는 조선사람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한편 헨더슨은 ‘한대선’이라는 한국 이름을 즐겨 썼다.



●교수님은 언론학자이자, 정치학자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내가 원래 일본에 관심이 많았다. 박사 학위(미국 컬럼비아대) 논문도 일본 정치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썼다. 일본 정치를 연구하려면 일본말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40년생은 일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광복 이후 일본어가 금기시됐으니까.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미국인 강사에게 일어를 배웠다.”



●언론학자·정치학자로서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가.



 “폐쇄적인 내셔널리즘은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나’ ‘내 생각’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j 칵테일 >> 5·16과 헨더슨



김정기 교수가 1987년 헨더슨을 만난 것은 사실 도자기 때문은 아니었다. 김 교수가 마침 미국에 갈 일이 생겼는데, 언론사에 종사하는 지인으로부터 부탁 하나를 받았다 한다. ‘5·16을 한국에서 겪은 헨더슨에게, 5·16의 비사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헨더슨을 만난 직후인 87년 5월 김 교수는 국내의 한 월간지에 글을 실었다. ‘박정희 쿠데타를 살린 것은 쿠바였다’는 내용이었다. 61년 5·16 쿠데타가 터진 시점은 피그만 사건이 터진 지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61년 4월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하자 미국은 쿠바 피그만에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쿠바의 혁명정부를 전복시키려다 실패했는데, 한국에서 또 실패한다면 곤란하다’는 우려에서 5·16 쿠데타 진압을 미국이 포기했다는 것이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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