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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6-2

중앙일보 2011.03.19 03:04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선생님 아파트로 가요’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아무리 길지 않은 소품이라도 그것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연출가에게는 그 작업 자체가 그대로 한 작품이 된다. 그런데 무용수까지 합치면 출연자가 쉰 명이 넘고 공연시간만도 두 시간이나 되는, 그것도 생애 첫 번째로 연출하는 뮤지컬이고 보면 ‘너 어디 있느냐’에 대한 내 몰두가 어떤 것이었는지 대강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의 제작 과정은 그리 대단할 것도 절실하게 감동을 줄 수도 없는 일련의 전문작업 또는 연출노동자의 반복노동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왕에도 너무 자주, 그리고 장황하게 내가 연출한 작품들의 제작 과정에 관해 얘기해왔다. 주로 혜련이 관련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얘기는 좀 자제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그것만으로는 내가 왜 그녀의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계속하는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가 자신이 연출한 무대에 음악감독으로 자주 참여했고, 그 삶의 이력이 다소 특이하다고 해서 모든 연출가가 밤 새워 그녀를 추억하지는 않는다.



 뮤지컬 ‘너 어디 있느냐’의 초연은 그 이듬해 봄에 첫 막을 올렸고, 한 달 남짓의 초연으로 거기 바친 우리의 믿음과 몰두는 벌써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초연이라는 제약이 있음에도 관객 동원부터 매스컴의 평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호의적이었다. 나는 몇 년의 공백 끝에 화려하게 재기한 중견 연출가로 돌아갔고, 이혼 후의 무기력과 침체는 재충전과 도약을 위한 움츠림으로 미화되기까지 했다.



 혜련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존재감으로 우리 악단과 연극무대에 재편입되었다. 그녀는 이제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보여준 높은 음악성으로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코카서스 인종적인 용모의 특성까지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아 혈통과 가족사까지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미녀들의 수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생겨나기 여러 해 전이었던 만큼 그녀의 존재는 낯설고 드문 만큼이나 넓고 빠르게 우리 사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나중에야 그게 다분히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관찰이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혜련도 전보다 몇 배나 적극적이고 의욕에 차 이 땅과 우리 속에 자리 잡는 듯 보였다. 그녀는 연극이나 무대음악에만 갇혀 있지 않고, 방송의 연예 프로그램이건 그때 한창 우리 사회가 열 올리고 있던 원어민 강사 코스건 그녀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나갔다. 당연히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늘어나고 거기에 따라 새로운 남자도 생긴 듯했다.



 그러다 보니 영국에서 돌아와 뮤지컬 ‘너 어디 있느냐’의 제작 기간과 초연 기간 한 달을 합쳐 거의 일 년 가까이나 함께 지내다시피 한 혜련은 첫 번째 공연이 끝나면서부터 나와 조금씩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다시 몰려든 사람들과 새로 시작된 관계에 골몰해 있던 때였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에게서 어떤 상실감은커녕 특별히 서운한 느낌조차 품을 겨를이 없었다. 여러 날 또는 몇 주일 만에 만나면, 너무 쉽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녀에게서 막연한 불안이나 불만 같은 것을 느끼면서도 의례적인 축하나 격려로 헤어지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어떤 수입 뮤지컬 개막식에서 나는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지낸 혜련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브로드웨이를 휩쓴 그 뮤지컬 수입 컨소시엄에 참여한 극단주의 초대를 받아 갔고, 혜련은 한국 측 음악감독의 친구로 초대받아 온 자리였다. 공연이 끝나고 마련된 자리서부터 내 곁에 와 앉은 그녀가 이차에서도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전과 달리 함부로 취해가더니 밤이 늦어 자리가 끝날 무렵 아직 헤어지지 않은 일행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서슴없이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 저하고 한잔 더해요. 실은 저 오늘 공연장에 나올 때부터 선생님과 한잔 할 작정이었거든요.”



 그러고는 멈칫하는 나나 재미있게 쳐다보는 일행의 눈길에 아랑곳 않고 나를 끌었다.



 아득한 부산 시절부터 그때까지 나는 혜련과 수없이 많은 술자리에 앉아왔지만, 내가 아는 바로 그녀는 옳은 술꾼이 아니었다. 주량으로 본다면 술을 마신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한 번도 그녀가 취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마신 듯 만 듯, 취한 듯 만 듯,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는 것으로 술꾼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 같은 자세였다. 그런데 그날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취한 목소리를 듣고 보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네가 웬일이야? 술에 다 취하고? 무슨 일 있어?”



 그렇게 물으면서 나도 모르게 살피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약간 취한 것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과장할 때 흔히 그러듯 껄껄거리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진한 부산 사투리로 받았다.



 “무슨 일은예. 우리 ‘너 어디 있느냐’ 끝나고, 술은 처음이다 아입니꺼? 물 건너 길거리 대학 동창일 때는 얼매나 자주 마셨습니꺼?”



 “별일이다. 그래도 여태껏 네가 먼저 마시자고 하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변하는 기 사람 아입니꺼? 내라꼬 술 한잔 하고 싶을 때가 없겠십니꺼?”



 우리가 그렇게 주고받는 사이에 일행은 흩어지고 두 사람만 남아 자연스럽게 술집을 찾아들게 되었다. 그러나 벌써 자정이 가깝고, 공연장 부근의 술집 거리는 공연 관계자인 셈인 우리 둘 모두 낯이 알려진 곳이라 마땅하게 퍼질러 앉을 만한 술집이 없었다. 한 군데 비교적 호젓한 술집을 찾아들었으나 벌써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라 주인 눈치만 보다가 쫓겨나고 보니 다시 갈 곳이 막막했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변죽만 울리다가 일어나게 된 게 아쉬운지 혜련이 다시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아직 그 아파트 사시죠? 그리로 가죠. 선생님이나 저나 이 동네에서는 너무 쪽이 팔려 아무래도 이 시각에 마음 편하게 한잔 마실 곳은 없을 것 같네요.”



 그해 이른 봄 ‘너 어디 있느냐’ 리허설이 끝난 밤 혜련은 우리 극단 스태프들과 함께 내 아파트에 와본 적이 있었다. 그 밤 늦도록 마시고 단원들 모두 함께 내 아파트에 널브러졌는데, 혜련이 문득 그때의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기억해낸 듯했다. 하지만 그때는 주인인 나까지 포함해서 남녀 일곱의 혼숙이었다. 자정이 넘어 우리 둘만 마주 앉아 마시는데도 그때처럼 자유롭고 편안할지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우리 사이지만, 오밤중 외진 아파트에서 이혼남 이혼녀가 배석 없이 단 둘이서만 퍼 마시다가 널브러지기에는 좀 불편하지 않을까?”



 내가 그 불편을 그런 물음으로 상기시켜보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괜찮아유. 언제 슨상님이 날 여자 취급하기나 혔남유? 새삼스럽기는.”



 당시 어떤 코미디언을 흉내 내어 그렇게 내 말을 받고는 크게 두 팔을 휘저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택시에 오른 뒤에 하던 말을 이어가듯 덧붙였다.



 “뭐, 세상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를 숙녀 취급해주지도 않았지만서두.”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찔러와 내가 바로 받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지난 일 년 이 나라 온갖 멋쟁이들과 재미있게 돌아치더니만, 숙녀 대접을 받지 못했다니?”



 그러자 그녀가 잠시 눈길을 모아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풀쑥 웃으며 말했다.



 “아하, 그러셨어요? 그래서 일 없으면 반년이 다 되도록 제게 전화 한 통 내지 않으셨어요? 그 대단한 숙녀의 사업을 존중해 주시느라고.”



 그런 그녀의 말속에는 취한 듯한 가운데도 뼈가 있었다. 그게 왠지 섬뜩해 그 까닭을 캐물어보려 했으나, 백미러로 우리 두 사람을 흘긋거리는 운전기사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나는 그냥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하여튼 좋아. 그럼 집에 가서 애기하자.”



 그 무렵은 이전 몇 년과는 다른 이유로 술을 많이 마시던 때이고, 또 이래저래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 내 아파트에는 평소에도 비축된 술이 많았다. 거기다가 며칠 전에는 작심하고 마트로 가 한 아름 안고 온 마른안주도 있어 술판을 벌이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막상 둘이 술자리를 펼쳐놓고 보니 새삼 어색하고 거북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어색함과 거북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백 킬로 폭탄이라고 이름 붙인 큰 폭탄주 한 잔을 스스로 제조해 마신 내가 불쑥 물었다.



 “그래,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나라가 너를 여자로 대접해주지 않았다니?”



 그때 뭔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혜련이 여전히 가시가 느껴지는 말투로 받았다.



 “그럼 선생님은 이 나라 남자들이 나를 제대로 된 여자로 대접해주었다고 믿으세요?”



 그 반문에 몰리는 기분이 들어 내가 어깃장 놓듯 받았다.



 “소문만으로도 요란하던데. 나는 오래잖아 네 청첩장이라도 받는 줄 알았지.”



 “그게 어떤 소문이었지요? 누구와 어떻게 지낸다 하던가요?”



 혜련이 가볍게 나를 노려보듯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문열 소설가

일러스트: 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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