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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 유럽 축구 현장을 가다 - 로마에서의 에필로그

중앙일보 2011.03.15 00:29 종합 28면 지면보기



그 옛날 콜로세움을 달리던 검투사들은, 지금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찬다



콜로세움.



“인간은 게임 없이 살 수 없다.”



 축구기행을 마친 내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마치 큰 경기를 마친 축구선수처럼 다리에 붉고 푸른 멍이 들고 손톱 거스러미가 일고, 입술은 부르트고, 팔꿈치 관절이 저렸다. 경기장을 걸어서 돌아다니노라면 군중과 몸이 부딪치는 걸 피할 수 없다. 수만 명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나오니 팔다리가 긁히고, 경기장만 아니라 전철에서 버스에서 내 발은 셀 수 없이 밟혔다. 런던에서 내 발이 가장 피곤했다. 아스널이 바르셀로나를 2대1로 꺾은 밤. 에미레이트 구장에서 가까운 할로웨이 전철역이 폐쇄되었다. 흥분한 관중이 몰려 사고가 날까 봐 경기가 끝난 뒤에 역의 출입을 막는다는 설명을 듣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상암구장 옆의 지하철역을 경기 뒤에 막는다면, 분노한 관중이 소리 지르며 때려부수고 난리도 아닐 텐데. 거칠게 항의하는 런던시민을 보지 못했다. 이겨서 그런가? 팀마다 팬들의 성향이 다를 터. 조금 떨어진 다음 역까지 걸어가라는 경찰의 권고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혼잡한 지하철에 매달려 간신히 귀가하던 밤, 경기 끝나고 2시간 반이 지나 내 호텔방을 찾아 들어와 쓰러지지도 못하고 침대에 앉아 챔스리그 관전평을 완성했다. 그리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그날 오후에 바르셀로나로 날아갔으니, 내 몸이 아직은 쓸 만한가.



 마지막 원고를 보내고, 로마에 도착하고 이틀 만에 호텔 밖으로 나가 시내를 구경했다. 여긴 너무 아름다운 곳. 혼자 와도 외롭지 않은 도시. 3월 초인데도 로마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낮에는 고대의 유적들을 답사하고 밤이면 나치오날레 거리의 바에서 금방 구운 신선한 피자 조각을 뜯으며 축구중계를 보았다. 한국에서는 피자나 샌드위치는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나도 내가 피자 한 판을 다 먹어치울 줄 몰랐다.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식당에서도 오래된 팝음악이 흔히 들렸다. 최신 유행곡이 명동을 점령한 우리나라와 달리, 그네들은 옛것들을 지금도 사랑했다. 음식을 나르며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은 옛날에 나온 음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미안하단 말은 가장 어려운 말)’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던 웨이터. 몇 년 전에 바르셀로나를 떠난 브라질의 축구스타 호나우지뉴를 아직도 잊지 않고 그처럼 머리를 땋아 묶고 현란한 발기술을 흉내 내어 갈채를 받던 ‘람블라스의 호나우지뉴’. 산타 안나 성당의 작은 예배당에서 내가 들은 기타 연주(낡은 교회 건물을 연주회장으로 활용하는 발상이 참신해, 역사가 숨쉬는 장소에 매료되어 20유로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11시부터 12시까지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진짜 미사의식을 치르던 로마의 판테온. 신과 인간, 고대와 현대, 새것과 낡은 것이 자연스레 섞인 이 모든 이미지들이 나의 유럽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한복판, 두 개의 언덕 사이의 움푹 들어간 평지에,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 콜로세움이 서 있다.



 로마에 일주일간 머물며 나는 콜로세움을 세 번 방문했다. 아침에 저녁에 그리고 밤에. 그 엄청난 규모에, 엄청난 규모로 자행되던 살인의 잔인함에, 고대 로마의 건축기술에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이천 년 전에 세워진 고대의 원형경기장을 보고 내가 느낀 감회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콜로세움을 직접 본 뒤에 축구에 대한 나의 생각이 달라졌고, 문명에 대한 고정관념이 흔들렸고,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이해가 깊어졌다. 관중의 눈이 부시지 않도록 꼭대기에 벽을 세워 태양을 가리던 섬세한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과 짐승들을 자신들의 흥미를 위해 무참히 살해했다. 영화에 나오는 검투 장면이 얼마간 허구인 줄 알았는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콜로세움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하의 구조물 (HYPOGEUM). 짐승들과 노예들을 수용하던 지하의 방과 통로들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집단살인의 흔적 앞에서 나는 전율했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 A.D.) 황제가 시작하고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이 기념비적 건물이 완공되던 서기 80년, 백 일간의 축제가 이어지며 9000마리가 넘는 야생동물이 희생되었다. 사람의 먹이가 아니라 눈요기, 게임의 대상으로. 경기장 주변이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라, 마치 대자연 속에서의 사냥 같은 착각을 일으켜 흥을 돋웠다. 콜로세움은 로마인들의 극장, 모의 ‘사냥터’였다. 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분된 출입구와 좌석 배치도 내 눈길을 끌었다. 황제와 그의 족속들은 검투사들과 다른 지하의 통로로 출입해 일반대중과 옷깃도 스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5년에 죄수들의 검투사 훈련을 중지시키고, 생명을 중시하는 기독교가 널리 퍼지며 콜로세움에서 죽음에 이르는 피비린내 나는 게임이 중단되었다니, 기독교라는 종교의 가치가 새삼 다가왔다. 살육을 즐기던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죄의식’을 가르쳤다! 죄의식이야말로 문명의 증거다.



 기술이 뛰어난 검투사들은 유명한 운동선수와 비슷한 인기를 누렸다는데, 지금 그 이름은 어디에도 없고 무대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쇼’는 계속된다. 칼과 헬멧 대신 현대의 검투사들은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찬다. 피로 물들던 모래 바닥이 땀으로 범벅이 된 잔디로 바뀌었을 뿐, 게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 그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한 번으로는 부족해 두 번 세 번 골망을 흔들어 적의 전의를 완전히 꺾는 것. 극적인 순간에 터진 예술적인 골이 우리에게 주는 황홀감. 인간은 게임 없이 살 수 없다. 잔혹한 싸움이 평화로운(?) 공놀이로 변했으니, 역사는 진보했다 말할 수 있으리.



 로마를 떠나 파리를 거쳐 3월 8일 아침에 에어프랑스 264편으로 인천공항에 내렸다. 사람은 도착했는데, 짐이 오지 않아 며칠 애를 태웠다. 내 가방을 어서 찾아달라고 항공사에 전화했더니 승객인 내가 직접 인터넷으로 짐의 위치를 추적해 보란다. 노트북의 배터리는 물론 전원장치도 모두 잃어버린 여행가방 속에 있는데 무슨 컴퓨터로? 이틀이 지나 택배로 가방을 받고, 더러워진 옷들을 세탁하고 노트북의 전원에 불이 켜지는 순간, 드디어 나의 여행이 끝났다.



시인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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