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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87만원을 그냥 드립니다”

중앙일보 2011.03.15 00:01 종합 34면 지면보기






정용환
홍콩 특파원




지금 홍콩은 때아닌 무상복지 논란이 한창이다. 해마다 쓰고 남은 불용예산을 처리하느라 머리를 싸맸던 홍콩 정부. 올해는 빳빳한 현금으로 18세 이상 영주권자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대상자가 홍콩 거주민 700만 명 가운데 올해 고교를 졸업하는 예비 사회인을 비롯한 600만 명에 이른다. 일인당 6000홍콩달러(약 87만원)씩이다. 홍콩 정부는 당초 이 돈을 퇴직자 연금에 보태려고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서민층의 반발에 부닥치자 물가인상으로 인한 서민층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홍콩의 영주권자 모두에게 화끈하게 풀어버린 것이다. 다음달 초 의결 일정이 잡힌 의회에선 정치적 손익계산에 분주하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논란의 한복판에 중화권 최고 부호로 꼽히는 리카싱(李嘉誠) 청쿵(長江)실업 회장을 비롯한 홍콩의 억만장자들이 서게 됐다. 서민들은 ‘억만장자들이 6000홍콩달러 받고 살림 폈다고 기뻐하겠냐’ 며 기막혀 한다. 내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를 앞두고 표를 겨냥한 선심성 낭비 행정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급기야 지난 일요일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홍콩 정부 청사 인근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정부를 성토했다. 특히 8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층에선 ‘정부 예산을 이렇게 살포해도 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공짜 현금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실시 이후 14년간 쌓인 중국인 이민자들과 홍콩인 사이의 갈등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홍콩에 기여한 게 뭐 있다고 이 돈을 받으려고 하느냐’며 이민자들에게 거부감을 감추지 않는 글들이 쏟아진다. 중국인 이민자들은 ‘한번 주기로 한 이상 뺏을 수 없다’며 양보할 기세가 아니다.



 중국인 이민자 유입 등으로 인한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홍콩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은 희박해졌고 경쟁률 높은 정부의 공공임대·공영아파트 분양만 쳐다보는 신세가 됐다. 이런 울분이 6000홍콩달러 무차별 분배를 계기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조치가 사회 분열상만 드러내 ‘자유 도시’ 홍콩의 이미지만 깎아먹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내년 대선·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무상복지 공방이 사회적 이슈로 주목받고 있다. 홍콩의 현금 살포 이슈는 우리의 무상복지 논쟁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무상급식 논쟁에 대입해 보면 닮은 점이 도드라진다. 리카싱처럼 억만장자 부모들이 한 끼에 2000~3000원 하는 점심을 공짜로 준다고 좋은 정책이라고 반색할까. 홍콩에선 세금 많이 냈으니 ‘6000홍콩달러의 횡재’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사행성 소비만 부추기는 이런 공짜 복지 대신 공영아파트를 더 짓고 고령화 시대를 대비하는 준비자금으로 적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박수를 받는다. 홍콩의 분열상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얼마나 더 과세 부담을 져야 하고 실효성 높은 맞춤 복지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못한 무상복지 공방은 사회 통합을 좀먹는다.



정용환 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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