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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의 시장 헤집기] 투자은행

중앙선데이 2011.03.13 01:21 209호 29면 지면보기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 금융의 변방이었다. 20세기 들어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포드 같은 미국 기업들이 세계 제조업을 평정했지만 금융업에서만큼은 유럽, 특히 런던(영국)의 위세에 기가 죽어 있었다.

이런 열세를 뒤엎어 미국을 세계 금융 중심지로 만든 게 JP모건이다. JP모건이 유럽의 내로라하는 은행들의 허를 찔러 큰일을 낸 곳은 바로 일본 시장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정부는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몰렸다. 일본 정부는 지진 복구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 은행들에 국채를 사 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거들떠보는 곳이 없었다. 일본 경제의 회복은 요원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날 판이었다.

이때 JP모건이 일본 정부에 은밀히 접근해 담판을 지었다. 미국 달러화로 표시된 국채를 발행하면 인수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 제의를 수용해 처음으로 미국달러 표시 국채 1억5000만 달러어치를 발행했다. 그 뒤 JP모건은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 일본경제가 예상보다 빨리 회복돼 채권에서 대박이 났고, 일본의 해외증권 발행도 독식하다시피 했다. 일본 정부가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고 모건의 손을 계속 꽉 잡았던 것이다.

당시 JP모건의 선택은 투자은행(IB) 업무로 돈을 번다는 게 뭔지를 보여 준 모범이었다. 시장의 맥을 꿰뚫는 안목, 맞춤형 금융상품 디자인, 될성부른 딜에 대한 과감한 베팅, 고객과 돈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파워 등등. 전체적으로 금융 소프트웨어 개발과 자금 동원, 위험 관리 능력 등이 IB 경쟁력의 요체임을 보여 준 셈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취임 이후 한국형 IB의 육성이 빅 이슈로 등장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유가증권을 인수해 시장성 있는 금융상품으로 바꿔 팔고, 기업 인수합병(M&A)을 중개하며, 대규모 프로젝트 금융을 주관하는 글로벌 IB가 나오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내정자가 앞으로 우리금융지주를 합병해 IB업무에 강한 메가뱅크로 만드는 작업을 주도할 것이란 관측도 대두된다.

증권업계에서도 정부가 자기자본투자(PI)에 대한 규제를 풀어 주면 자본을 확충해 덩치를 키우겠다고 화답하고 있다. 대형 IB의 탄생을 위한 필요조건은 하나씩 마련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금융 소프트웨어 창출 능력, 즉 사람의 문제다. 덩치로 따지면 일본·중국 금융회사들이 이미 한국 금융사들을 한참 앞서 갔다. 중국 공상은행이나 건설은행, 일본 미쓰비시 등도 대형 IB를 표방하며 한국보다 5~10배나 많은 자본금을 확충해 놨다. 그러나 이들을 경쟁력 있는 글로벌 IB로 평가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요즘 뉴욕 월가와 런던시티에선 이름도 생소한 부티크형 IB들이 M&A와 기업 구조조정 업무에서 잇따라 두각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새로운 현상이다. 돈타령만 할 게 아니다. 작고 강한 IB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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