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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조롱하는 가면 행렬, 스트레스 날리는 오렌지 전투

중앙선데이 2011.03.13 01:20 209호 8면 지면보기
1.베니스 카니발 풍경
비아렛조-각국 지도자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노란 재킷에 노란 모자, 분홍 나비 넥타이에 분홍 조끼를 입고 한 손에 지휘봉을 든 15m짜리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서커스단 단장이 되어 나타났다. 무대에는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당나귀를 타고 빙빙 돌고 있다. 마차 뒤편 창살 박힌 동물 우리 속에는 짐승 가죽을 입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어슬렁거린다. 그 뒤를 거대한 공룡뼈에 얼굴만 살아있는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따라왔다. 갑자기 그 얼굴이 반으로 쩍 갈라지더니 안에서 해골이 나타났다. 그 주변에는 해골 머리가 끝에 달린 4개의 남근이 신나게 꿈틀거렸다. 정자를 연상시키는 차림의 많은 댄서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같은 춤을 췄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스캔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김성희의 유럽문화통신: 이탈리아 3개 도시의 카니발 축제 현장


2 비아렛조 카니발에 참가한 어린이
이어 야릇한 카마수트라 자세를 한 알록달록한 색상의 거인들이 인도 전통 복장을 하고 인도 춤을 추는 사람들과 함께 등장했다. 거대한 사마귀와 풀숲, 미디어를 풍자한 거대한 로봇과 그를 조종하는 TV 토론 프로그램 앵커들, 어망을 뚫고 도망치는 조스 등을 태운 카니발 퍼레이드 마차들은 관광객이 환호성을 지르도록 만들었다.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의 유명한 바닷가 휴양지 비아렛조의 카니발 축제는 1873년 시작돼 138년의 전통이 있다. 처음엔 몇몇 부자들이 높은 세금에 항의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퍼레이드를 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사회 문제를 조롱하는 내용을 담아 인형 마차를 꾸미는 것이 전통이 됐다. 1925년부터 폐지 등을 이용해 얇고 가볍지만 튼튼하고 화려한 종이 마차와 유명 인사 인형들을 만들고 있다. 올해엔 36개의 거대한 인형과 마차가 제작됐다. 각 마차에는 카니발 복장을 한 수십 명의 댄서가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그 옆에는 거대한 인형에 연결된 줄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살짝살짝 보였다. 인형들은 사람이 직접 줄을 당겨 조종한다. 오후 3시부터 약 두시간 동안 해변을 빙빙 도는 이 퍼레이드는 입장료가 15유로(약 2만4000원). 4개월에서 6개월은 족히 걸렸을 제작 기간과 장시간 함께 연습했을 춤, 준비한 의상 등등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닌 듯했다. 세 살배기 아기부터 팔순 어르신까지 주민들은 해적이나 슈렉 같은 톡톡 튀는 복장을 하고 퍼레이드에 참가해 카니발을 함께 즐겼다.

베니스-19세기 귀족들의 환생
1296년 시작됐다고 하는 베니스의 카니발 축제는 당시에는 12월 26일부터 재의 화요일까지 6주간 진행됐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신분이나 지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가면은 신분과 계층을 숨기고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하고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면의 사용이 남용되자 베니스 공화국은 가면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기도 했다. 베니스가 카니발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 베니스 축제나 연극, 극장에서 사용되던 무대 의상이나 가면이 전 유럽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부터다.

3 비아렛조 카니발에 등장한 베를루스코니 공룡4 비아렛조 카니발 중 ‘돈의 위력’5 비아렛조 카니발 중 ‘서커스’6 비아렛조 카니발 중 ‘인도 카마수트라’7 이브레아 카니발의 오렌지 던지기 전투 8 이브레아 카니발의 오렌지 전투에 참가할 용사들
라르바(Larva), 또는 볼토(Volto)라고 하는 흰색 가면에 검은색 망토, 그리고 검은색의 삼각형 모자로 구성된 바우타(La Bauta)라는 복장은 남녀 모두가 즐겼다. 18세기 말 베니스 공화국이 프랑스인에게 정복당했을 때 사라졌다가 1980년대 이후 부활했다. 그후 매년 하나의 테마를 정해 축제를 진행하고 그 해의 베스트 가면상을 수상한다.올해의 테마는 ‘19세기의 환기’.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역사 속 인물들이 산마르코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회색 레이스와 주얼리로 우아하게 차려 입은 쌍둥이 귀족자매, 새 둥지를 어깨에 달고 머리에 새장을 얹은 귀족부인, 카드의 무늬가 찍힌 복장을 한 카지노의 귀족 부부, 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자매 등 기발한 아이디어로 치장한 의상들이다.

그동안 베니스에서는 가면 따로, 의상 따로 착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의상과 가면이 조화를 이뤘다. 옷에 있는 무늬가 가면에도 그려져 있고 모자, 옷, 액세서리 모두 통일감을 줬다. 이건 바로 자기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다. 의상 퀄리티 면에서 지난해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모두 뚱뚱하다. 아무래도 추워서 속에 옷을 많이 껴입은 모양이다.귀족과 광대들이 갑자기 주변에 있는 아무하고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산마르코 광장이 베르사유 궁전 속 거울의 방이라도 된 듯했다. 미소도 짓지 않는 무표정한 가면을 쓴 이들은 한 30분 동안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더니 마치 자정이 되어 도망치는 신데렐라처럼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카니발 기간 중 베니스는 도시 전체가 극장이 된다.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다. 가면 뒤에 가려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광장과 골목을 누빈다. 온 도시에 널려 있는 가면들은 자신들을 무대에 데리고 나갈 주인을 무표정하게 기다린다.

이브레아-빨간모자 안쓰면 오렌지 공격 대상
지난 토요일 저녁 알프스 산맥이 시작되는 이탈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중세도시 이브레아 시의 시청광장. 밤 9시 정각이 되자 시청 발코니에 장군 옷차림의 시장이 등장해 공식 오프닝을 선언했다. 잠시 후 발코니에 한 여자가 나와 두 손을 휘저으며 인사했다. 관중은 미친 듯 환호했다. 이 여자가 이브레아 카니발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무냐이아’(Mugnaia·방앗간 주인)다. 그는 중세시대 초야권을 거부한 한 방앗간 주인의 딸. 이브레아 카니발은 전제정치에 저항한 그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축제를 만들었다. 매년 미스 무냐이아를 선발해 축제에 흥취를 불어넣는다. 오프닝이 끝난 후 사람들은 중앙로로 자리를 옮겨 밤 10시부터 시작된 15분간의 불꽃놀이를 즐겼다.

이튿날인 일요일은 오렌지 던지기 전투가 열리는 날이다.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 입구에 설치된 매표소에서는 5유로의 통행료를 받았다. 대부분의 시민과 관광객들은 양말처럼 생긴 넓적하고 긴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빨래를 짜듯 둘둘 말아 댕기처럼 묶거나 상투처럼 틀어올렸다. 옆으로 접어 배지나 브로치로 고정한 멋쟁이들도 있었다. 카니발에 참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모자는 도시 입구 가판대에서 팔았지만 왠지 촌스러워 사지 않았다.

광장으로 갔더니 빨간 모자를 쓴 한 관광객이 모자를 쓰라고 권했다.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해 오렌지를 던지는 용사라는 의미고, 빨간 모자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라 오렌지를 던지지 말아달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큰일이다. 모자를 사려면 옛 도시 입구까지 가야 하는데 전투는 시작될 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전투에 참가해야겠다.
오후 2시 광장에 있던 말 탄 기사와 꽃마차가 나팔소리와 함께 움직이며 카니발의 시작을 알렸다. 오렌지 상자가 내려졌고 참가자들은 각자의 주머니와 바구니에 오렌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중세 군인처럼 헬멧과 면갑으로 중무장을 한 전투 용사들이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위에서 신의 가호를 부르는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순간 마부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마차가 광장에 들어서자 전사들은 고함을 지르더니 오렌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대기하던 수백 명의 사람들도 마차에 탄 전사들에게 오렌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도 질세라 오렌지 폭탄을 날려댔다. 어찌나 빨리 던지는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첫 번째 마차가 광장 중간쯤 도착했을 무렵 두 번째 마차가 광장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오렌지를 던지기 시작하는데 빨간 모자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을 구별할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오렌지 파편이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순간 내 머리에도 오렌지가 퍽 하고 떨어졌다. 아무리 물렁물렁한 오렌지이지만 정신을 쏙 빼놓는다. 빨간 즙이 터져 얼굴에 흘러내리는 것이 꼭 피가 터져 내리는 것 같았다. 주변에는 얼굴이 오렌지 즙과 피로 범벅이 된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코나 입에 맞은 것이 분명하다. 이날 응급실을 찾은 응급환자만 180명이 넘었다고 하니 실제로 더 많은 사람이 다쳤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축제가 아니라 진짜 전투다.

수백, 수천의 오렌지가 “쉭쉭” 소리를 내며 광장을 날아다녔다. 광장 바닥은 오렌지 카펫이 됐고 흥건한 빨간 즙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드디어 두 시간 동안의 전투가 끝났다. 거리를 나서는 빨간 모자 차림 사람들의 물결이 마치 2002년 월드컵 게임을 응원하던 붉은악마 같았다. 중앙도로 밑을 유유히 흐르는 도라 강에는 맹렬한 전투의 파편인 오렌지들이 둥둥 흘러가고 있었다.



김성희씨는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다. 유럽을 돌며 각종 공연과 전시를 보는 게취미이자 특기. 『더 주얼』(2009)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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