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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어땠건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거야”

중앙선데이 2011.03.13 01:03 209호 5면 지면보기
좋은 봄날이다. 시궁창 냄새 자욱한 판자촌, 공동 수돗가 근처 용길이네로 모인 이웃들이 한창 시끌벅적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함석지붕 위에 올라간 소년은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여기는 옛날 나와 우리 가족이 살던 집과 마을.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시끄러운 이 동네가, 하릴없이 웃고 떠드는 동네 사람들이 싫었다”고. 여기는 오사카, 전후 이십여 년간 재일 한국인 ‘자이니치’들이 점거해 온 국유지의 작은 마을, 철거 직전의 허름한 곱창집이다.

한·일 합작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20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한·일 합작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08년 예술의전당 20주년, 일본 신국립극장 10주년 기념으로 공동 기획돼 양국에서 전석 매진의 기록을 세운 지 3년 만이다. 일본 양대 연극상인 ‘아사히 무대예술상’ ‘요미우리 연극대상’을 휩쓸고 한국 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베스트3’ 에 꼽히는 등 관객의 호응은 물론 높은 작품성까지 인정받으며 그간 강력한 앙코르 요청을 받아왔다. 1970년대 일본이 ‘아시아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열고 ‘지구 시민이 하나가 되었다’며 들떠 있던 고도성장의 절정에서, 성장의 수혜와 역방향으로 길을 떠나야 했던 ‘자이니치’의 한(恨)의 정서가 흩날리는 벚꽃의 미의식과 불꽃놀이의 제의적 의미, 특유의 오와라이(お笑い) 연극적 요소 등 일본적 문화코드에 녹여져 한·일 양 국민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선 작품이다.

정의신(鄭義信). 2004년 기타노 다케시 주연 영화 ‘피와 뼈’로 키네마준포 각본상, 일본 아카데미 우수각본상 등을 수상한 재일동포 3세 인기 작가다. 그가 각본·연출한 이 ‘자이니치’ 가족 이야기는 고도 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일본 현대사의 번외편이다. 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강제 철거 위기에 놓인 자이니치 마을. 국가의 번영의 역사와는 반대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했던가. 세월의 흐름 속에 ‘자이니치’의 존재마저 모호해져 가는 오늘, “잊혀져 가는 사람들에게도 큰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를 통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았던 마이너리티의 역사가 무대 위에 되살아났다.

각각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일본에 건너온 용길네와 영순네가 꾸린 새로운 가정, 이들의 곱창집에는 용길의 딸 시즈카와 리카, 영순의 딸 미카, 용길과 영순의 아들 도키오가 함께 살고 있다. 국유지 강제 철거의 바람이 거세던 1970년 전후, 세 딸이 각자 짝을 찾고 길을 떠나는 과정을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렸다. 그 춘하추동의 잔잔한 에피소드들에는 그 시절 자이니치가 겪었던 차별과 빈곤의 고통이 아프게 스며 나온다. 모든 막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비행장 활주로의 굉음은 저들의 가슴 한가운데 뚫린 구멍을 통과하는 스산한 바람소리다. 강제 철거가 진행되면서 세 자매는 각각 ‘가슴의 구멍’을 메워줄 상대-자이니치이거나 한국인이거나 일본인이거나-를 만나 북한으로, 남한으로, 또 일본 어디론가 떠나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절망 속에서도 저마다 내일을 향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유일하게 희망을 포기한 도키오.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다 이지메를 당해 자살한 도키오의 망령은 그 시절을 겪은 자이니치들에게 결코 아물 수 없는 내면의 상처이자 차별에 직면해 셀 수 없이 자신을 죽여야 했던 기억의 유령이다. 엔딩 직전 다시 지붕 위에 선 도키오가 “사실은 따뜻하고 활기찼던 이 동네를, 사람들을 좋아했었다”고 울먹이는 것은, 때론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달픈 삶이었지만 그 속에 웃음도, 희망도, 사랑도 있는 ‘보통 사람의 삶’이었음을 기억하는 작가의 고백이다. 차별의 설움조차도 자이니치의 당당한 정체성으로 기억되어야 하며, 고난과 좌절이 있었기에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었다는. 잊혀져 가는 자이니치의 역사를 잊을 수 없도록 되새김질한 이유다.

“어제가 어떤 날이었건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순을 실은 리어카 하나 달랑 끌고 마을을 떠나는 용길의 마지막 대사처럼 “반드시 내일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오늘이 중요하다”는 것이 작가의 변이다. 다시 봄이다. 복숭아 빛으로 반짝이며 흩뿌려지는 벚꽃 잎이 그들의 고단한 어깨 위에 내려앉으며 초라한 뒷모습을 응원한다. 절망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도움닫기가 필요한 것뿐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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