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 Insight] 세계 유일의 시청각장애인 극단 ‘날라갓’ … 알론 레비 대표

중앙일보 2011.03.12 02:03 주말섹션 8면 지면보기
극장에서 팝콘 먹으며 영화 보기, 가족 위해 빵 굽기, 옆사람과 수다 떨기 …. 평범한 휴일의 일상을 ‘평생에 꼭 이뤄보고 싶은 소원’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다. ‘날라갓(Nalaga'at)’이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극단에서 활동하는 연극배우들이다. 이들에게는 스크린 영상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이자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시청각장애인 극단이다. 이들이 5월 한국에 온다. 공연시설 점검차 한국을 방문한 알론 레비(40) 날라갓 극단 대표를 만났다.


보고 듣지 못하는 우리가 무대에 선다.
당신이 내 손 잡을 때, 당신이 내게 존재한다













날라갓 극단은 이스라엘의 서부, 그러니까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자파(Jaffa)에 자신의 상설 극장이 있다. 1년에 한두 차례 정도 해외공연도 하고 있다. 뉴욕·취리히·토론토의 무대에 섰고, 지난해 7월에는 런던국제연극제(LIFT)에 참여했다. 이런 이들이 5월 10∼11일 이틀간 세 차례 경기도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의정부 국제 음악극 축제’의 개막 공연을 제안받은 것이다. 아시아 공연은 한국이 처음이다. 이들이 선보일 작품의 제목은 ‘빵만으로 안 돼요’(Not by bread alone)다. 11명의 배우가 출연하는데, 실제 무대 위에 오븐을 설치해 놓고 빵을 굽는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 막 구운 빵을 나눠준다. 레비 대표는 장애인이 아니어서 인터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극단 대표로서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해외에서 초청을 많이 받을 것 같다.



 “연말에 알바니아, 내년엔 미국, 그리고 2014년에는 런던에서 또 공연이 예정돼 있다. 지난해 7월 런던 공연이 CNN을 통해 보도된 뒤 해외에서 초청을 많이 받고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우리를 초청한 곳이 한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극단들처럼 해외에 자주 다니기는 어렵다. 우리 극단은 독특하니까.”



●이번 한국 공연에는 모두 몇 명이 오나.



 “11명의 배우, 10명의 통역자, 그리고 3명의 기술자, 총감독인 아디나 탈(Adina Tal·58), 그리고 나, 이렇게 26명이 온다.”



●배우들이 시각장애인이거나 청각장애인이란 것인가.



 “아니다. 시각과 청각 두 가지 모두 장애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통역자가 필요하다.”



●어떻게 장애를 갖게 됐나.



 “선천적으로 시각·청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부는 처음엔 청각만 없었으나 10대 초반에 시력마저 잃었다.”



●그럼 배우들이 말을 할 수 없나.



 “귀가 들려야 말을 배우고, 그래야 말을 하지 않나. 배우 중 세 명은 청력이 아주 약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또렷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말은 한다. 나머지 배우는 말을 못한다. 그래서 수화(手話)로 소통한다.”









날라갓 극단의 배우 중 한 명인 배트 셰바(Bat Sheva)가 다른 사람과 두 손을 맞댄 채 수화를 나누고 있다. 시청각장애인 배우들은 촉감을 이용해 수화를 인식한다.



●시각장애인인데 수화가 가능한가.



 “아주 복잡하다. 수화를 하는 배우마다 자신의 통역자가 있다. 배우 A가 배우 B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전하려면 ‘A→A의 통역자→B 통역자→B’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통역자는 물론 장애인이 아니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아무것도…. 시청각 장애인의 경우 가족들과의 유대가 매우 약한 것이 특징이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과 인사하고선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게 그들의 일과였다. 그러나 날라갓에서 연기를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얻게 됐다.”



 배우들은 삼십대 중반에서 65세까지다. 하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2년 반을 연습해야 한다. 공연 중에 장면 전환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야 할 때는 북을 친다. 그러면 배우들이 북의 진동을 감지하고 무대 위의 장면이 바뀌는 시간임을 알아챈다. 수많은 연습의 결과다.



●배우와 통역자는 어떻게 소통하나. 배우들이 자기 통역자의 수화를 눈으로 볼 수 없는데.



 “배우들이 자기 손의 촉감으로 통역자의 수화를 이해한다.”



 레비 대표는 기자의 양손을 끌어당겨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간단한 수화 하나를 보여줬다. 상대방의 수화를 시각이 아닌 촉감으로 ‘읽게’ 하는 방법이었다.



●배우와 통역자의 관계가 매우 특별할 것 같다.



 “그렇다. 서로 친할 수밖에 없다. 통역자는 해외공연을 나오면 하루 24시간 일하게 된다. 배우들이 식사하는 것, 외출하는 것, 화장실 가는 것, 이런 모든 것을 도와준다. 통역자들은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배우의 그림자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늘 검은색 옷을 입는다. 이들이 없으면 연극이 불가능하다. 연극이 막을 내리고 배우들의 이름이 한 명씩 호명될 때도 배우의 등을 슬쩍 건드려준다. ‘당신이 관객에게 인사할 차례가 됐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배우 소개가 끝나면 통역자 소개가 이어진다. 통역자들은 극단에 소속돼 여기에서 월급을 받는다.”



 레비 대표의 설명을 듣고 날라갓의 철학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연기’는 연기 이상의 무엇이었다.



 “비장애인들은 사회 속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산다. 그런데 우리 배우들은 이전에는 항상 받기만 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들에게 자신도 사회에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자는 것이었다.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점이 중요하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도 줄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말이다.”



 레비 대표는 이스라엘의 상설 극장에 딸려 있는 커피숍과 레스토랑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극장에 딸린 레스토랑의 이름은 ‘소등’(消燈). 이곳은 실내에 불을 켜지 않는다. 내부가 완전히 컴컴하다. 손님을 맞고 음식을 내놓는 종업원들은 시각장애인이다.



 “레스토랑 손님들은 종업원의 안내 없이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손님들은 우리 종업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극장 밖과는 완전히 정반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레스토랑 종업원이 시각장애인인 데 비해, 커피숍 종업원들은 청각장애인이다. 방문객들로 하여금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모두 체험케 하자는 취지다. 레비 대표는 연극과 커피숍과 레스토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 연극도 감동적이지만 커피숍은 최고의 커피를, 레스토랑은 최고의 음식을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 극장에 오는 사람들은 그 이상의 것을 얻어 간다. 어떤 이는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또 다른 이는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서 나간다.”









날라갓 극단 배우들의 얼굴에 웃음이 넘친다. 외모만으로는 그들이 시청각장애인임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방문자로서는 장애인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렇다. 우리(비장애인들)는 장애를 슬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는 슬픈 것이 아니다. 행복이고 놀라움이다. 날라갓에 있는 우리 직원들은 늘 행복하다. 항상 웃는다. 이들은 매우 활동적인 데다 정기적으로 월급도 받는다. 날라갓에 오기 전에 그들은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날라갓 극장은 현재 14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이 중 80명이 장애인이다.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극단이 돈을 벌어야 하지 않나.



 “재정 문제는 사실 매우 복잡하다. 우리 커피숍을 예로 들어보자. 보통의 커피숍으로 운영한다면 종업원 4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업원이 12명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손님들에게 그저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손님들 역시 커피 때문에 이곳에 오진 않는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의 커뮤니케이션센터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 물론 커피도 훌륭하지만….”



●극단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현재 총감독을 맡고 있는 아디나 탈이 2002년에 만들었다.



●그 역시 장애인인가.



 “아니다. 그녀는 배우이자 연출가다. 한 장애인단체에서 ‘장애인을 위한 드라마 워크숍을 만들어 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한 것이 극단 설립의 계기가 됐다. 원래 그 단체에선 재미 삼아 한번 기획해본 행사였다. 그런데 탈이 이 워크숍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더니 아예 장애인들과 극단을 차렸다. 탈이 없었다면 날라갓은 생겨날 수 없었다.”



●당신은 어떻게 날라갓에 오게 됐나.



 “나는 조명·음향장비 회사를 운영했고, 우리 회사에서 이 극단의 조명·음향 시스템 부분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상설 극장 건립을 도와주다 보니 이들과 일하는 게 너무 좋아 회사를 처분해 버렸다.”



 날라갓 극단은 2007년까지는 상설 공연장 없이 여기저기서 공연을 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해외에도 극단이 알려지면서 미국·스위스 등지에서 공연해 달라는 초청도 받았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2007년 12월 자신들의 극장을 열었다. 일주일에 세 차례 공연을 한다.











●날라갓에 오기 전에 당신의 인생은 어떠했나.



 “이스라엘에선 남녀 모두 군대에 간다. 보통은 제대하고 1년 정도 해외여행을 한다. 나는 일본·홍콩·태국·중국 등지를 여행했다. 이후에 이런저런 일을 했다. 수영 강사도 잠깐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음향·조명·전기 이런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스피커 두 개와 작은 차 하나를 사서 조명회사를 차렸다. 그게 점점 커져 제법 큰 회사가 됐다.”



●얼마나 커졌나?



 “회사를 처분할 때는 직원이 30명, 그리고 큰 트럭이 두 대였다. TV 쇼와 축제 같은 데서 일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 왜 사업을 접었나.



 “회사가 커지고, 돈은 많이 벌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매일 바빴지만 ‘도대체 나에게 남는 게 무엇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던 것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처음엔 빛과 음향을 만들어내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데 일이 많아지고 바빠지면서 오히려 일에 파묻히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족함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행복하다. 내가 사람들과 아주 친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느낌 속에 살고 있다.”



●가족들도 당신의 변신을 환영했나.



 “아내가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내 소유의 회사가 있고 소득이 적지 않고 그랬으니… 또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올지 그땐 몰랐으니까. 지금은 아내도 매우 만족해 한다.”



●멍청한 질문처럼 들리겠지만 돈은 이전보다 훨씬 적게 벌 텐데.



 “그렇다. 그러나 아무 문제 없다. 돈 이상의 것을 얻고 있으니까.



●돈 이상의 것?



 “날라갓에는 많은 감동이 있다. 지난해 배우 13명을 추가로 뽑을 때의 일이다. 시청각장애 여성 한 명이 배우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두 딸을 데리고 왔는데, 그녀와 두 딸 모두 수화를 못 배운 상태였다. 그녀를 배우로 받아들이면서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우선 딸들과 함께 수화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석 달 뒤에 그녀가 딸들과 수화로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날라갓에 온 덕에 그녀가 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는 돈 버는 것도 중요할 텐데.



 “우리는 비영리재단이다.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쓰는 예산의 70%를 우리가 직접 벌고 있다. 믿기지 않을 것이다.”



●공연 중에 빵을 굽는 것은 관객들과의 소통을 위한 것인가.



 “우리 배우 중에 ‘쇼샤나’라는 여성이 있다. 약간의 청각이 남아 있어 말을 한다. 물론 앞은 못 본다.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이 내 앞을 그저 스쳐 지나가면 당신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내 앞에 멈춰 서서 ‘안녕’이라 말하고, 내 손을 잡으면 그제야 당신이 내게 존재한다’고.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을 무대 위로 초대하는 이유를 이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날라갓’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인가.



 ‘히브리어로 ‘만져 달라(Do touch)는 뜻이다. 우리 배우들은 사람들과 손 잡고 포옹하는 것을 즐긴다.”





j 칵테일 >> "경복궁 수문장 놀라지 말라”



날라갓 극단의 배우들이 런던 버킹엄궁 호위병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7월 런던 초청공연 때 일이다. 시청각장애인이지만 이들은 해외공연을 가면 남들처럼 관광을 즐긴다. 그런데 이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주로 ‘촉감’으로 사람과 사물을 인식하고 마음을 읽는다. 이들이 대화를 하기 위해선 배우와 수화통역자가 2인1조로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래서 손은 이들이 세계와 소통하는 수단이 된다.



 날라갓 배우들은 버킹엄궁 호위병 교대식 때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소통을 했다. 근엄한 버킹엄 호위병들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게 됐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는 호위병이라도 급작스레 몸을 더듬고 손을 잡히니 놀랄 수밖에…. 날라갓 극단은 5월 방한 공연 때는 경복궁을 관광한다고 한다. 우리의 경복궁 수문장들도 그날 깜짝 놀라지 마시라.



글= 성시윤 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