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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 지키는 털모자 108개 남기고 …

중앙일보 2011.03.12 00:17 종합 32면 지면보기



암과 싸운 생애 마지막 3년
후진국 신생아 보온용 모자
뜨개질로 마감한 조영순씨



조영순씨의 남편 이인식씨가 부인의 영정사진 앞에서 조씨가 생전에 뜬 모자를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



지난달 22일, 국제아동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 사무실로 상자 하나가 배달됐다. 상자 에는 종이에 곱게 싸인 털모자 108개가 들어있었다.



 모자를 뜬 사람은 경기도 용인의 주부 조영순씨. 63세인 조씨는 유방암과 싸우다 지난달 8일 세상을 떠났다. 조씨가 암을 발견한 건 2004년 12월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한쪽 가슴을 잘라냈지만 암세포는 반 년 만에 간과 척추까지 번졌다. 남편 이인식(65)씨는 “항상 쾌활하던 집사람이 그때만큼 서럽게 울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조씨는 체념하지 않았다. 남은 삶을 이웃을 위해 살기로 한 것이다. 조씨는 예전부터 해오던 봉사활동에 더 열심히 참여했다. 노인요양시설을 찾아가 목욕 봉사를 했고 서예 강좌도 열었다. 3년 전, 우연히 세이브더칠드런의 모자 뜨기 캠페인을 알게 됐다. 일교차가 큰 아프리카 등에선 신생아들에게 모자만 씌워줘도 체온이 2도나 올라가 미숙아 사망률을 70%까지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캠페인의 취지였다.



 그때부터 조씨는 모자 뜨기에 몰두했다. 세 번의 큰 수술과 30여 차례가 넘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기력만 남으면 모자를 떴다. 남편 이씨는 “병원에서는 침대에 누워서, 집에서는 거실에 앉아 링거를 치렁치렁 꽂은 손으로 혼신을 다해 모자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던 초반에는 2~3일이면 모자 하나를 완성했다. 그러나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조씨의 손톱은 빠지거나 까맣게 죽어갔고 모자 뜨는 속도도 느려졌다. 결국 지난달 1일 조씨는 108개째를 마지막으로 심장이상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일주일 뒤 숨을 거뒀다.



 조씨의 유품을 정리하던 남편 이씨는 모자를 모아 성당 동료들과 함께 세탁한 뒤 세이브더칠드런에 보냈다. 조씨가 생전에 입던 옷과 신었던 구두는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이씨는 “부인은 죽었지만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4년째 캠페인을 해왔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모자를 뜬 건 처음”이라며 “모자는 다음달 에티오피아 등에 전달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사진=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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