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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구루병

중앙일보 2011.03.12 00:02 종합 35면 지면보기








뱀파이어의 적은 세 가지. 마늘과 십자가, 햇빛이다. 햇빛을 보면 시꺼멓게 타버린다. 그래서 별수 없이 ‘어둠의 자식’이다. 2009년 전 세계적 붐을 일으킨 판타지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들은 예외다. 주인공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를 포함한 컬렌가(家) 흡혈귀들은 태양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피부를 뽐낸다.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창백하고 흰 꽃미남 에드워드의 피부는, 그가 모는 볼보자동차와 함께 부(富)의 상징이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윤초시 손녀가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던 것처럼.



 그런데 똑같이 희고 창백한 피부라 해도 ‘구한말 폐병 시인 같다’는 표현으로 오면 정반대 뜻이 된다. 그 시절 폐결핵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처럼 돈 없는 문인들 사이에서 폐병앓이는 일상다반사였다. “각혈(喀血)을 해야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는 농담도 있었고, “폐병 시인의 각혈은 일제 억압에 대한 구토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나올 지경이었다. 서양이라고 다를까.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등 비극의 여주인공들은 꼭 폐병을 앓는다.



 결핵 등 폐병은 그래서 ‘가난병’이라고 부른다. 후진국이나 빈민가에서 자주 발생하는 병이라서다. 야맹증·각기병·괴혈병·구루병 등 중학교 과학시간에 배웠던 비타민 결핍증도 여기에 속한다. 이 중 구루병은 비타민D가 부족해 뼈의 변형이 오는 질환이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엔 구루병에 걸려 ‘곱사등’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공황 시절을 무대로 한 존 스타인벡의 1939년작 『분노의 포도』에도 구루병을 앓는 빈곤의 현실이 나온다. “기업들, 은행들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농사는 잘됐지만 굶주린 사람들은 도로로 나섰다. 곡식 창고는 가득 차 있어도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렸고, 펠라그라병 때문에 옆구리에선 종기가 솟아올랐다.”



 비타민D의 별명은 ‘선샤인(sunshine) 비타민’이다. 볕을 쬐면 몸 안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구루병이 다시 유행한다고 한다. TV와 컴퓨터 게임에 빠져 야외활동이 부족해서다. 얼굴이 타는 걸 꺼려 바르는 자외선차단제도 원인이다. 모든 게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에 결핍의 질병이 도는 건 아이러니다. 뱀파이어처럼 햇빛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햇빛은 돈 내고 쬐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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