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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각서와 유서

중앙일보 2011.03.10 19:42 종합 34면 지면보기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중국 상하이의 훙차오(虹橋)지구. 일본 총영사관과 일본계 기업 지사, 일본인 거주 아파트가 몰려 있는 곳이다. 이 번화가에 ‘가구야 히메(姬)’라는 가라오케가 있었다. 방 20여 개에 손님 시중을 드는 여성 종업원만도 50여 명이나 됐다. ‘가구야 히메’는 달로 돌아갔다는 전설 속 공주로, 일본인이면 누구나 아는 옛날이야기 주인공이다. 이 가라오케를 일본 총영사관에서 본국과의 문서 수발을 담당하던 영사관원(통신관·당시 46세)이 자주 들락거렸다. 급기야 한 여종업원과 깊은 정이 들었다. 2003년 6월, 이 중국인 여성이 갑자기 공안(경찰)에게 붙잡혀갔다. 매춘 혐의였다. 여성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하루 만에 풀려났다. 그리고는 일본 영사관원에게 “나를 봐서 사람을 좀 만나 달라”고 했다. 중국인 여성과 사귀었다는 약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단 한 번만”이라는 조건을 붙여 ‘공안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국인 남성과 통역(여성)을 만났다. 2003년 12월 14일.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상냥했고, 저자세까지 보였다. “앞으로 친구로 지내 달라”고 했다. 별다른 정보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2004년 2월 20일, 이 일본인의 아파트에 중국어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국가안전부’가 발신인으로 된 편지는 “총영사, 수석영사, 당신 중 누군가와 만나고 싶으니 결정해 연락을 달라”며 전화번호와 접촉할 시간을 적어놓았다. 일본인은 자국 총영사관에 알리지 않고 편지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공안대장’과 상의했다. 2주일 후, 공안대장이 “범인을 체포했으니 걱정 말라”고 연락해왔다. 이 순간, 영사관원은 편지가 그들의 자작극이라는, 함정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벌써 더 깊은 늪으로 빠져버린 다음이었다. 점점 노골적인 협박이 이어졌다.



 2004년 5월 2일, 영사관원은 공안대장을 또 만났다. 대장은 “당신이 사할린으로 전근 가게 된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왜 나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우리와 만나는 사실을 총영사관이 알게 되면 곤란해질 거야. 국가 간 문제가 될걸. 그러면 너는 직업을 잃게 돼. 가족과도 함께 살고, 그 여성(중국인)도 행복해져야 하지 않나.” 공안대장은 중국어로 된 일본 영사관 직원 명부를 내놓고 직원들의 일본 내 소속 부처를 대라고 요구했다. 부처를 말해주자 “그중에서 정보수집 담당부서 출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이번엔 “영사관원들이 만나는 중국인들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다. “일본으로 가는 외교행낭의 비행기편을 알려 달라”는 요구도 했다.



 이 영사관원은 결국 나흘 뒤인 5월 6일 새벽 영사관 전신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이날 오후 7시에 공안대장을 또 만나기로 돼 있었다. 총영사·부인 등에게 보내는 5통의 유서를 남겼고, 위에 소개한 일들은 유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물론 중국 당국은 영사관원의 죽음과 일절 관련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중·일 간 몇 차례 외교 공방전이 벌어지다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영사관원이 일부 정보를 누설했다고 보면서도 ‘순직’으로 처리했다. 왜? 유서에 해답이 있다. 그는 유서에 “(그들을 다시) 만나면 일본을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무서운 나라입니다. 평생 그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팔면서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면 이 방식(자살)밖에 없습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한 중국 여인에게 놀아난 일을 스파이 사건이라고 단정지을 근거는 아직 없다. 그러나 여성 문제로 국익과 국가 체면에 금이 간 점은 비슷하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더 이상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는 유서 구절은 비장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제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벌금 6억원을 드리고, 제 손가락 하나를 잘라 드리겠습니다”라는 한국인 전 영사의 ‘각서’와는 너무나도 대비되기 때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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