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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기자의 A/S]"착하게 살았는데…"11살 소녀의 좌절과 희망가

중앙일보 2011.03.10 11:49






[사진제공=‘함께하는 사랑밭’]



소녀가 병상에서 눈을 떴다. 얼굴과 상체를 압박붕대로 칭칭 동여맨 지 10일만이다. 눈만 껌벅껌벅댈 뿐 말이 없었다. 화마가 소녀의 목에 상처를 냈기 때문이다. 이후 두달이 흘렀다. 소녀가 입을 뗐다. "엄…마, 언제 퇴원해?" 엄마는 '억~,헉~'할 뿐 말을 못했다. 가슴에서 차오르는 서러움과 불쌍함….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소녀는 아빠와 동생 얘기를 묻지 않았다. 저세상으로 떠난 사실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아빠와 노는 다른 병상의 아이들을 보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옆병상에서 '아빠' 소리만 들리면 애써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또 입을 열었다. "난 착하게 살았는데…."



소녀의 사진은 12월 초 인터넷에 공개됐다. 11살 아연(가명)이다. 화재로 아빠를 잃었고, 동생을 잃었고, 집을 잃었고, 꿈을 잃었다.



NGO ‘함께하는 사랑밭’이 나섰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연이를 돕기 위해서다. 그로부터 100일, 아연이에게 작지만 따뜻한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2010.10.13. 새벽 3시=대전시 대덕구 성촌동의 한 아파트. 아연이와 남동생은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평소처럼 마루에 전기매트를 깔고 아빠를 기다렸다. 중앙난방이라 온기가 덜했기 때문이다. 새벽 1시쯤 귀가한 아빠와 엄마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새벽 2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전기매트 전원은 가열되고 있었다. 화마가 순식간에 집을 덮쳤다. 뜨거운 기운에 눈을 뜬 아빠에겐 아들과 딸 자식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얼굴이 타들어가는 딸을 베란다로 안아 날랐다. 엄마는 딸의 얼굴에 연신 물을 뿌렸다. 아빠는 아들을 구하러 불길로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아빠는 영영 나오지 않았다.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연이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상태가 악화돼 화상전문병원인 서울 베스티안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동안 아빠와 동생은 하늘나라로 가는 의식을 치렀다. 사고가 난 지 열흘 만에 아연이가 눈을 떴다. 말을 못했다. 불이 났을 때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후두 화상을 입었다. 12월, 드디어 입을 땐 아연이는 아빠와 동생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고 당시 동생을 구하러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그리고 다시 나오지 못한 것을 아연인 알고 있었다.



화재가 난 뒤 4000만원 전셋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불 탄 집은 4월에 팔린다. 하지만 대출금 1억원을 갚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얼마 안된다. 지금까지 아연이 수술비로 들어간 돈은 4000만원. 한 달 치료비만 150만원이 든다.



◇“민사고 가고 싶었는데"=아연이는 얼굴과 목 부위에 두 차례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다. 손목과 목 관절에 이상이 생겨 물리 치료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아연이를 더 괴롭힌 건 외상의 고통이 아니었다. 아빠와의 추억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와 놀아주는 다른 아빠들만 보면 눈물을 글썽였다. 동생 나이 또래만 봐도 울먹였다. ‘아빠’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래서 더 애달팠다. 어느 날 아연이가 원망스럽게 물었다. “엄마,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아연이는 글짓기를 무척 잘했다. 1년 동안 탄 상만 11개다. 꿈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학교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아연이는 “민족사관학교에 꼭 들어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책상엔 민사고 사진을 오려붙여 놨다. 하지만 사진은 불탔고 아연이도 좌절했다. 5학년 수업일수는 얼추 맞췄지만 6학년 1년을 다닐 자신이 없다고 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종종 문자가 왔지만 아연이는 “다 나으면 친구들에게 전화하겠다”며 연락을 끊었다. 자존감이 강한 아연이는 친구들에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아연이는 중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만12세 미만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 아연이는 내년에 6학년으로 재입학해야 한다.



◇"나 정도면 괜찮잖아"=친구들 사이에서 아연이의 별명은 ‘할매’였다. ‘애어른’ 같아서다. 맞벌이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려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결하고 동생을 돌봐주는데 익숙했다. 지금도 그 별명은 유효하다. 엄마가 우울해 하면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장면들을 흉내 내며 웃겼다. 아연이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엄마, 나 학교 수업 따라가려면 영·수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은데….” “빌 게이츠와 오바마 책 읽으니까 너무 좋아.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인물들이잖아.” 어느 날엔 아연이가 인터넷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도 밝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큰 감동을 줬던 이지선씨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아연이는 “지선 이모도 힘들었지만 다 참아냈구나. 이모보다는 내가 낫네. 나 정도면 괜찮잖아”라고 말했다.



◇10일,아연이를 위한 콘서트=아연이는 10일 평소 그렇게 타고 싶던 KTX를 처음 탄다. 이날 오후 7시 서울시 종로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아연이만을 위해 열리는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아연이의 사연을 접한 이들이 재능 기부와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가수 한동준, 김현준의 마술쇼, Classical Voice 하이체(전 국립오페라 합창단 멤버) 의 노래 공연들을 볼 수 있다.

NGO ‘함께하는 사랑밭’이 지난해 말부터 시작한 캠페인에는 2050만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후원 및 연락처 '함께하는 사랑밭(www.withgo.or.kr)' 02-2612-4400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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