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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LG생활건강 ‘5가지 근무시간’ 실험 … 오래 일하지 않아도 실적은 좋아

중앙일보 2011.03.10 00:26 경제 2면 지면보기



유연근무제 5년 … 매출 3배로
“일 몰입도·충성도 높아지고 우수 신입사원 유치에도 도움”



지난 8일 오후 5시45분, LG생활건강 사무실. 유연근무제 참여율이 높아져 빈자리가 많다. LG생활건강은 유연근무를 독려하기 위해 책상마다 자신의 근무시간을 적은 팻말을 달게 했다. [김상선 기자]



‘자유로운 출퇴근’~. 직장인이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고를 수 있는 ‘유연근무제(Flexible Working Place)’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기업에선 수십 년 전부터 적극적으로 도입해 왔지만 한국에선 아직 걸음마 단계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노는 거다’ ‘일은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다.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LG생활건강의 유연근무제 운영을 살펴봤다.



지난 8일 오후 5시30분. 서울 종로구 신문로의 LG생활건강 IR팀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 회사가 시행 중인 유연근무제에 따라 팀원 3명이 모두 오후 5시 이전에 퇴근했기 때문이다. IR팀 문선화(36) 팀장의 퇴근 시간은 오후 4시30분. 그는 오전 7시30분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그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 아이 때문에 유연근무를 선택했다. 아이의 알림장을 확인하고 함께 책가방을 싸는 일이 퇴근 후 주요 일과다. 분당에 살고 있는 문 팀장은 “유연근무제 덕분에 육아가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LG생활건강은 5가지 근무시간을 운용하고 있다. 직원들은 오전 7시부터 오전 9시까지 30분 단위로 나누어진 5가지 출근시간 중에서 골라 출근한 뒤 8시간만 근무하면 된다. 이 회사는 원래 2005년부터 유연근무제를 시행했다. 오전 8시~오후 5시, 오전 9시~오후 6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90%가 종전과 같은 시간대 근무(오전 9시~오후 6시)를 택했다. 그러나 지난달 유연근무제를 세분화하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오전 9시~오후 6시 외 다른 시간대 근무를 선택한 직원 비중이 전체 3분의 1(31%)까지 올라간 것이다.



 유연근무가 워킹맘에게만 유용한 건 아니다. 20대 중반인 송방주(26) 연구원이 선택한 근무시간은 오전 8시30분~오후 5시30분. 그는 오후 6시30분에 시작하는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1급 자격증 관련 강의를 대학에서 듣기 위해 적합한 시간대를 고른 것이다. 송 연구원은 “직장인이 자기계발하기 힘든 건 시간뿐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데 유연근무로 이 두 가지가 모두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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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연근무제는 회사 분위기를 바꿨다. 특히 모든 직원이 근무하는 오전 10시~오후 4시 업무 집중도가 확 높아졌다. 이인익(37) 홍보팀 차장은 “업무 특성상 다른 부서와 협업이 많은데 오후 4시 이후엔 자리에 없는 직원이 있어 그 전에 처리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정시 퇴근율도 높아졌다. 2005년 53%이던 게 지난해 72%까지 올랐다. 정시퇴근을 한다는 것은 근무시간에 집중해서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간 실적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올랐다. 같은 시기 매출액은 3배 상승했다. LG생활건강 정경식 조직문화팀장은 “유연근무로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오히려 실적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유연한 조직문화가 좋아 입사했다는 신입사원이 많을 정도로 우수사원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변화를 이끈 이는 차석용 사장이다. 차 사장은 “21세기엔 오래 일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일과 가정의 균형을 통해 업무 몰입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경영철학을 앞세워 2005년 부임과 동시에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그는 지난해 말 유연근무제 채택률이 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드라이브를 걸었다. 조직문화팀은 800여 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일일이 설문조사를 벌였다. 5가지 근무는 그렇게 나왔다.



 ◆확대되는 유연근무제=SK그룹은 유연근무제에 적극적이다. SK텔레콤 산하 PDF(Product Development Factory) 부문 직원들은 오전 8시~오전 11시 사이에 자율적으로 출근한다. SK가스 수급운영팀도 오전 9시~오전 10시, SK해운은 오전 8시~오전 10시 사이 출근해 8시간의 근무시간을 채우면 된다. SK그룹 관계자는 “SKT PDF의 경우 탄력근무제 출범 5개월 만에 64개의 상품이 개발됐다”며 “유연근무제가 업무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자율 근무에는 최태원 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최 회장은 최근 ‘신입사원과의 대화’에서 “산업화 시대의 회사는 다 같이 모여 앉아 일해야 성과가 나왔지만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12월부터 자녀가 만 6세 이하인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탄력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 제도는 본사의 경우 오전 7시30분부터 10시30분까지, 점포의 경우 오전 8시 30분부터 10시30분까지 1시간 단위로 출근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 신선식품 바이어들은 훨씬 더 탄력적이다. 신선식품담당 수산팀 권민승 바이어는 이틀에 한 번꼴로 밤 12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출근한다. 수산시장에서의 업무 종료시간은 새벽 3시쯤. 일이 끝나면 권 바이어는 집으로 가 휴식을 취한 뒤 오후 2시에 사무실로 나와 나머지 업무를 본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몇 년 못 가 정시 출퇴근제로 바뀐 곳도 있다. 대부분의 기업은 유연근무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진현 수석연구원은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고 지식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선진국에서는 유연근무가 일반화됐다”며 “유연근무가 정착하려면 얼마나 오래 근무했느냐로 직원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글=최지영·정선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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