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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별 볼일 없는 ‘민중후보’ 알짜 공관 진출길 확 뚫렸다

중앙선데이 2011.03.06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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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채 파동 6개월, 달라진 외교부 인사

외교통상부에서 쓰이는 ‘업계 용어’ 가운데 ‘민중 후보’란 말이 있다. 명문대 출신 등 화려한 ‘스펙’을 갖추고 북미국이나 북핵외교기획단 등 출세 코스로 꼽히는 부서에 일찌감치 입성한 외교관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재외공관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 근무는 북미국 등 몇몇 부서 출신의 전유물이었다. 다른 부서 출신이 안배 차원이나 근무 평점이 좋아 발탁되어 오면 처음엔 ‘고위층과 연줄이 닿는 모양’이라 짐작한다. 그러다 아무런 ‘빽’도 없다는 게 밝혀지면 그때부터 ‘민중 후보’란 별명이 붙게 된다.” 고위 외교관 K씨의 설명이다.



지난달 외교부 정기 인사에서 워싱턴 근무가 확정된 K서기관도 스펙만으로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민중 후보’다. 그의 선발은 이변 중의 이변으로 꼽힌다.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SKY 출신이 아닌 그는 외교부 경력 9년 가운데 3분의 2가량을 개발협력과나 외교안보연구원 등 이른바 ‘변방 부서’에서 보냈다. 육아휴직 중인 여성이란 점도 워싱턴 경쟁에선 약점이었다. 주미 대사관은 최근 7년 동안 여성 부임자가 없었을 만큼 남성 위주로 운영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워싱턴으로 발탁돼 ‘외교부의 신데렐라’라 불릴 수 있게 된 것은 어느 부서에서건 열심히 일해 평가가 좋았다는 점이다. 반면 예전 같으면 ‘워싱턴행은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겨졌을 북핵외교기획단 출신의 모 서기관은 아프가니스탄 근무로 낙착됐다. 워싱턴 다음 가는 선호 공관인 주유엔 대표부로 가게 된 또 다른 K서기관의 경우도 이변이었다. 그 역시 남미과·정책총괄과 등 비선호 부서만 맴돌았다. 주케냐 대사관에 근무 중인 N서기관을 유엔 대표부로 보내기로 한 것 또한 전례 없이 후진국 근무자를 발탁한 사례다.



이 같은 민중 후보들의 약진은 인사 시스템이 확 바뀐 덕분이다. 지난해 9월 초 유명환 당시 외교장관 딸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준 사실이 밝혀져 호된 홍역을 치른 지 6개월 사이에 일어난 변화다. 후임 김성환 장관은 몇 가지 혁신적인 인사 실험을 시도했다. 최우선 원칙은 ‘공정성’에 두었다. 땅에 떨어진 외교부의 신뢰와 권위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28명 국장들로 구성된 ‘제2 인사위원회’를 신설해 실무 직원의 인사를 결정하도록 한 게 대표적인 예다. 워싱턴과 유엔을 포함, 제네바·오스트리아·경제협력개발기구(OECD)·벨기에·중국·일본 등 최선호 공관 8곳에 보낼 외교관 16명을 뽑기 위해 소집된 인사위원회는 오후 5시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단 한 차례 휴식도 없이 계속됐다.



16명 인사를 위해 24명(출장자 제외)의 간부가 7시간 이상 마라톤 회의를 벌인 것이다. 워싱턴·유엔·도쿄 등 경쟁이 치열한 자리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결국 투표까지 갔다. 모든 국장이 공평하게 한 표씩을 행사하게 됨에 따라 특정 부서가 ‘알짜 공관’을 독과점해온 관행이 무너졌다. 또 워싱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이 2지망인 유엔·제네바 등에 순차적으로 배치되는 이른바 ‘캐스케이드(cascade) 현상’도 사라졌다.



그 결과 험지 근무를 자원하는 현상도 생겨났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 인사 때 험지 근무한 사실로 가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이른바 ‘청비총’도 이번 인사에서 사라졌다. 이는 청와대 파견자나, 장·차관 비서관, 인사담당자(총무)가 우대 받는 관행을 뜻하는 말이다. 이백순 외교부 인사기획관은 “이번 인사에서 청비총이란 말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장·차관부터 자신의 비서관·보좌관을 챙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과장급 인사에는 ‘드래프트’ 방식을 도입했다. 과장들이 희망부서를 복수로 써 내면 직속 상관인 국장들이 직접 자신과 같이 일할 과장을 고르는 시스템이다. 장·차관이 인사에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예영준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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