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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골라 입어도 패셔니스타 … ‘꽃중년’ 되기 쉬워졌다

중앙선데이 2011.03.06 00:58 208호 10면 지면보기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지.스트릿494 옴므’에서 고객이 쇼핑하고 있다. 쇼핑하는 40~50대 남성이 늘면서 점잖은 클래식 스타일을 제안하는 남성 편집매장이 백화점마다 생겼다. 조용철 기자
패션매거진 인스타일 미국판 2월호에 남성 2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실렸다. 질문 중에는 ‘여자 친구와의 쇼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도 있었다. 응답자의 53%가 ‘지루해 죽겠다(mind-numbingly boring)’고 답했다. ‘즐거운 주말 활동’이라고 답한 사람은 4%에 불과했다.
남녀 쇼핑 패턴의 간극이 화성과 금성만큼 멀다는 건 세계 보편의 진리다. 한국 남성은 말할 것도 없다. 엄마나 아내가 사다 주는, 튀지 않는 옷이면 만사 오케이인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2007년 ‘그루밍족(grooming族, 패션과 미용에 투자하는 남자)’이란 신조어가 뜨면서 ‘꾸미는 남자’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최근엔 연령대도 넓어져서 ‘꽃미남 아이돌’, 20~30대 ‘초식남’에 이어 ‘꽃중년’ 신드롬이 일고 있다. 40~50대까지도 패션·미용 등 자기관리에 신경 쓰고, 가꾸기 위해 지갑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력 있는 ‘쇼핑하는 남자’의 출현은 획일성과 지루함의 최고봉이었던 한국 남성복 시장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최근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남성 편집매장’이 백화점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백화점에 속속 등장하는 ‘남성패션 편집 매장’


컨셉트 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책임
‘멀티숍’, ‘셀렉트숍’이라고 하는 편집매장은 말 그대로 여러 브랜드의 상품을 골라서 모아놓고 판매하는 매장이다. 모아만 놓은 게 아니라 정해진 컨셉트에 맞게 다양한 브랜드에서 적합한 제품을 컬렉션한다. 품목도 의류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신발·가방·타이·양말·머플러·장갑·우산 등 모든 패션 아이템을 갖추고 있다. 다품종을 소량으로 갖춰 개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쇼핑 공간이다.

편집매장은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는 보편화돼 있다. 국내에선 2000년대 초 서울 청담동에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고급 수입 브랜드에 초점을 맞췄던 1세대 편집매장은 마르니, 발망, 스텔라매카트니 등이 국내에 자리 잡는 데 역할을 했다. 이어 나타난 2세대 편집매장은 라이프스타일 전반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브랜드도 다양해지고 가격대도 낮아져서 대형 명품 브랜드에 식상한 사람들이 개성과 희소성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찾았다. 이처럼 편집매장은 소수의 매니어층, ‘옷 좀 입는다’는 사람들이 쇼핑을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보수적인 남성 고객 대상의 편집매장이 보수적인 유통채널인 백화점으로 잇따라 들어왔다. 지난해 10월 신세계가 강남점에 330㎡(약 100평) 규모의 ‘멘즈 컬렉션(Men’s Collection)’을 두 달 뒤 갤러리아 압구정점도 ‘지.스트릿494 옴므(g.street 494 homme)’를 열었다. 롯데 잠실점에도 ‘팝 에디션(POP Edition)’이라는 편집매장이 개설됐고, 현대 압구정점에도 ‘리비에라(Liviera)’가 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클래식’을 기본 컨셉트로 이탈리아·영국 등에서 수입한 정통 슈트와 비즈니스 캐주얼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다.

많은 남성이 존재 자체도 모르는 편집매장이 백화점에 등장한 데 대해 남성잡지 아레나의 성범수 패션피처팀장은 “남성들의 구매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긴 트렌드”라고 말했다. “남성 패션 매니어는 아직 소수지만 전반적인 니즈(needs)가 커진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7년간 남성복을 담당한 롯데백화점 김성환 과장(상품본부 신md팀)은 “한국 남성들은 쇼핑할 때 딱 두 가지만 고민했다”고 말했다. “감색이냐, 검은색이냐”. 이런 남성들이 옷차림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코디까지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세계 ‘멘즈 컬렉션’의 우승현 매니저도 “가격보다는 옷의 디자인이나 색감에 따라 구매를 결정하는 남성 고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또 중요한 건 남성이 쇼핑하기 가장 좋은 공간이 사실은 편집매장이라는 점이다. 여러 곳을 둘러볼 필요 없이 한곳에서 모든 쇼핑을 마칠 수 있고, 스타일링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매장의 마네킹이 입고 있는 걸 그대로 벗겨내 입기만 해도 여러 브랜드를 적절히 섞어 옷 잘 입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지갑 사정만 허락한다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책임져 주는 편집매장에서 쇼핑에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

접근성 좋은 백화점에 편집매장이 들어서면서 입소문을 타고 남성 고객들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반응도 좋다. 신세계 ‘멘즈 컬렉션’은 2월 중순부터 고급 맞춤 슈트 행사를 진행 중인데 2주 만에 400만원대 슈트가 7벌 판매됐다. 롯데의 ‘팝 에디션’은 개장 이래 월평균 매출이 8000만원을 올리고 있다. 직수입 상품군 평균 매출 대비 130% 이상의 매출 기록이다. 올 상반기에 본점에 2호점을 개장할 계획도 갖고 있다.

하지만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이런 트렌드가 “높은 매출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고 얘기한다. “가격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정통 클래식을 표방하면서 소규모·공방의 장인이 만든 제품을 들여오다보니 인지도는 낮은데 가격은 상당히 고가인 것이다. 낯선 브랜드가 대형 명품 브랜드와 엇비슷하거나, 더 비싸다면 구매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고객들의 요구 수준이 높아지고 시장의 트렌드로 굳어진 상황에서 안 쫓아갈 수 없다”는 게 유통·패션업계의 속사정이다. 성범수 팀장도 “해외에서만 살 수 있던 브랜드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지만 아직은 비싸다”며 “백화점의 편집숍이 강남 지역에만 생기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다. “경제력 있는 고객이 몰려있는 강남권에서 고급스럽고 트렌디한 백화점 이미지를 만드는 데도 편집숍은 필요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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