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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신조약 위해 왔다” … 언론 앞에서 스탈린에 결정타

중앙선데이 2011.03.06 00:16 208호 29면 지면보기
1950년 2월 14일 오후 6시, 크렘린 궁에서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中蘇友好同盟互助條約) 조인식이 열렸다. 소련 측에서는 말렌코프(왼쪽에서 5번째), 배리아(왼쪽에서 3번째), 흐루쇼프(오른쪽에서 7번째) 등 정치국원 전원이 참석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약문서에 서명하는 중국 측 수석대표 저우언라이.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은 인구 7억과 무궁무진한 자원을 보유한 신중국의 국가원수였다. 제아무리 스탈린이라 할지라도 “생일 경축연에 온 마오쩌둥을 모스크바 교외에 연금했다”는 소문이 서방 세계에 난무하는 것을 등한시할 수 없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7>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었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세계를 향해 속내를 드러내겠다”는 마오의 전략을 꿰뚫어 볼 정도가 아니었다. 마오가 직접 나서서 한마디 던지는 것 외에는 온갖 억측에 찬물을 뿌릴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마오는 소련 측이 제의한 기자간담회를 마지못한 듯이 받아들였다.

마오는 방문 목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조약 체결이 최우선임을 분명히 밝혔다. “중·소동맹조약과 무역협정 등 해결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많다. 소비에트 국가의 경제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도시와 지방도 샅샅이 둘러보려 한다. 체류기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스탈린 생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1950년 1월 2일,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마오쩌둥과 타스통신 기자의 대담 내용이 실렸다. 스탈린도 마오의 방문 목적이 보도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신조약 체결 문제를 토의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오는 모르고 있었지만,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내전에서 손을 떼겠다는 미국의 정책도 스탈린의 태도에 변화를 줬다. 소련이 신중국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파악하자 더 이상 얄타협정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8시, 스탈린의 지시로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마오의 숙소를 찾아왔다. 중·소조약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마오는 3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첫째는 신조약의 체결, 둘째는 예전에 소련과 국민당 정부가 맺은 중·소우호조약에 관해 두 나라 당국자들이 의견을 나눴다는 공동성명 발표, 셋째는 양국 관계에 관한 요점을 몇 자 적어서 서명이나 하고 끝내버리자”였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뜻이라며 저우언라이가 회담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오는 것을 수락했다. 마오는 “구조약을 대체하는 신조약이냐”고 재차 확인했다. 몰로토프는 고개를 끄떡였다.
마오는 꼼꼼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내일 아침 베이징으로 전보를 치겠다. 5일간 준비해서 9일 날 출발하면 19일 날 도착할 수 있다. 20일 밤부터 회담에 들어가자.” 이어서 레닌 묘 참배와 레닌그라드, 고리키 시 방문 의사를 밝혔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공병창, 지하철, 집단농장 참관 외에 정치국원들과의 만남을 제의했다.

마오는 신생 정치대국의 최고 지도자로 손색이 없었다. 스탈린의 양보를 받아내기 전까지 혁명동지 런비스(任弼時·임필시)의 병문안 외에는 단 한번도 외출하거나 단독으로 소련 지도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지병 치료차 소련에 장기체류 중이던 막내아들도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중·소회담이 한참 진행 중이던 1월 30일, 스탈린은 그간 미적거리던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했다. 마오에겐 일언반구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당시 김일성도 모스크바에 와 있었는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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