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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시리즈를 마치며 (4) 백선엽 장군 인물기

중앙일보 2011.03.04 00:29 종합 10면 지면보기

가난했지만 책이 밥이었다 … 다툼 피했지만 큰싸움에 능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빚어진 민족의 참극. 60여 년 전 한반도엔 동심(童心)의 하늘에도 전쟁이 흘렀다. 낙하산을 펼치고 하늘을 가로질러 철새 떼처럼 쏟아져 내리는 군인들. 이 땅의 어린이들이 더 이상 전쟁을 겪지 않게 하려면, 우리 군인들이 더 이상 목숨을 잃지 않게 하려면 60년 전의 그 전쟁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사진은 6?25전쟁 무렵 대구 인근에서 미군 187연대의 대규모 공중강하 훈련을 보고 있는 한국 소년들의 모습. 정확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옛날에 물을 적게 채우면 기울고, 많이 채우면 엎어지는 그릇이 있었다. 딱 맞게 채울 경우에만 바로 서는 그릇이었다. 공자(孔子)는 그 그릇을 보면서 “물을 가운데에 채워져 바로 선다(中而正)”고 했다. 그 바르고 옳게 선 상태가 중정(中正)이다. 한때 중국대륙을 통치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집안으로부터 이를 본명으로 얻었다.

 장제스보다 이 이름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백선엽 장군이다. 그는 늘 가운데 서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생각한 뒤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가운데 섰으니 한쪽으로 기울어질 일이 없고, 그런 자리에 서서 넓게 살피고 깊이 생각하니 행동거지가 옳을 수밖에 없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왼쪽)과 유광종 선임기자.

 장군은 지금 세월의 풍상(風霜)을 그대로 안은 91세의 노인 모습 그대로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실은 ‘애늙은이’였다. 조숙(早熟)이라고 표현해도 좋고, 원숙(圓熟)이라고 해도 좋다. 제 각성(覺醒)을 지니고 삶을 살아갈 무렵부터 장군은 또래의 행동거지와는 아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1920년 출생한 백 장군은 약송 보통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평양시내에 있던 도립 도서관의 ‘상시(常時) 출근자’였다. 한쪽 책상에 조용히 앉아서 시간이 허용할 때까지 늘 무엇인가를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세태에서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게, 4학년짜리 국민학생(요즘은 초등학생)이 읽는 것은 다름 아닌 아사히(朝日)신문이었다. 일제시대 한반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수준의 신문, 그것도 사설까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일본 내의 동정, 그들이 강점했던 한반도가 돌아가는 사정, 일본과 독일이 일으킨 세계대전의 이모저모, 미국과 유럽의 이런 저런 모습들…. 소년 백선엽은 신문만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이가 차면서 그가 잡아든 책은 여러 종류였다. 일본의 고급 시사 잡지였던 ‘문예춘추(文藝春秋)’ ‘중앙공론(中央公論)’도 범상치 않은 이 소년의 눈을 잡아끌었다. 19세에 시작한 봉천(奉天·지금의 중국 선양)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그도 같은 모습이었다. 혈기 넘치는 군관학교 학생들이 토요일 외출을 나가면 먼저 가는 곳은 술집. 그러나 청년 백선엽은 책방부터 들렀다.

 가난한 어머니가 보내준 돈 대부분을 털어 그는 책을 샀다. 몇 푼 남은 돈으로는 중국식 만두를 샀다. 그리고 만두를 먹으면서 그는 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다시 5년 뒤의 그는 부산에 있었다. 막 출범한 대한민국 군대의 전신 국방경비대 5연대 중대장 신분. 그때의 그 역시 책을 집어들었다. 일본을 이긴 미국, 그 힘의 상징인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모든 경험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던 미 군사교범 등이었다. 그의 눈은 밝았고 예리했다. 그 자신이 그 당시에 무엇을 읽어야 했는지를 오랫동안의 독서 습관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치열한 독서로 어렸을 때부터 더 넓은 세계를 이해했고, 사람 사이에 복잡하게 벌어지는 많은 삶의 이치도 깨달았다. 조숙함을 넘어서 어렸을 적에 일찌감치 ‘애늙은이’로 취급됐던 이유다. 그래서 사람과 잘 다투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와닿는 게 없으면 그는 절대 남과 말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코피가 터지고, 상처가 나는 개구쟁이 시절의 평범한 다툼도 그에게는 없었다.



 일곱 살 때 여읜 부친, 뒤이어 찾아온 지독한 가난, 홀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담긴 가르침으로 그는 여러 성품을 얻었다. 밑바닥 삶을 이해했고,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다. 독서는 그런 그에게 자신 속에 쌓인 성품이 바르고 튼튼하게 자리를 잡도록 이끌었던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싸움을 피했지만 정작 싸움의 대가였다. 그러나 싸움의 도(道)를 큰 차원에서 상정할 줄 알았다. 남의 허점만을 파고들어 때리는 게릴라식 전법의 기(奇)보다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키워 큰 틀과 조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정(正)의 길을 걸었다.

 전쟁터에서 그의 눈은 밝았고, 귀는 항상 열려 있었다. 많은 것을 보고, 또 많은 것을 들으며 항상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에 옳게 서 있었다. 한국이라는 넓은 전쟁터에서 승패를 가를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 뭍에 올라선 미군의 힘을 활발하게 끌어들였다.

 중공군이 새카맣게 몰려왔을 때에는 적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재빠르게 알고서는 나아감과 물러섬의 진퇴(進退)를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6·25 전쟁 3년 동안 벌인 크고 작은 모든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대오(隊伍)를 크게 잃은 적이 없다.

 전선의 지휘관에게는 승리와 패배가 늘 번갈아 찾아오게 마련. 그 또한 적군 앞에서 물러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지는 흐름의 중간에, 그리고 정확한 지점에 서서 판단을 내렸던 그는 후퇴도 잘 했다. 자신의 병력을 잃지 않으면서 차분한 후퇴를 했고, 적이 피곤해졌다 싶으면 신속하게 정비한 대오를 앞장세워 상대를 물리쳤다.

 승부사(勝負師) 기질의 그는 모든 것을 싸움으로 보는 성향이 강하다. 적은 아니었으나 미군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는 것도 싸움으로 봤고, 나아가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안전을 얻어내는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도 싸움으로 인식했다. 그 모든 싸움에서 그는 정공법을 택했다.

 먼저 자신의 올바른 행동과 양심으로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절박한 대한민국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의 가치관에 입각해 설득을 벌임으로써 결국 얻을 것을 얻는 방식이었다. 달콤한 말, 꾸밈이 들어간 표정보다는 솔직함과 진정성으로 그들을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은 어린 시절부터 파묻혔던 광범위한 독서의 세계를 통해 만들어졌다. 사람이 빚어내는 모든 환경을 폭넓게 이해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를 살피고 또 살피며 생각을 이어갔던 덕분이다.

 그는 가장 큰 싸움을 극기(克己)로 설명한다.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 싸움의 으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승부사다. 자신을 이긴 사람이 상대를 이긴다는 점을 오래 전에 깨달은 사람이다.

 사세(事勢)를 정확하게 읽어 스스로를 가다듬는 예지력은 전쟁터의 많은 승리로 나타났고, 밑바닥 어려운 삶에 대한 이해는 사형 10여 일 전에 극적으로 살아난 박정희 구명사건으로 이어졌다. 그의 무서운 극기의 노력은 50년 8월의 다부동 격전장에서 총을 뽑아들고 ‘사단장 돌격’을 감행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말하자면 지혜와 어짊, 그리고 용맹함을 갖춘 장군이었다. 지장(智將)이자 덕장(德將)이며, 용장(勇將)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명장(名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선엽 장군
유광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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