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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세계화 시대 종교관

중앙일보 2011.03.04 00:23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14세기 중반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에는 파리에 사는 유대인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친구 중에는 아브라함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수년간 권해온 사람이 있다. 아브라함은 로마에 직접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아브라함의 친구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릴까 걱정한다. 교회의 부패상을 목격하면 아브라함의 개종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개종하기로 결정했다고 친구에게 전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토록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번성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참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야기엔 종교의 부패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프라슬리티제이션(proselytization)’, 즉 ‘타인을 개종시키려는 행위’의 문제를 제기한다. 프라슬리티제이션은 선교나 전도하고 뭐가 다를까. 선교는 좋고 프라슬리티제이션은 나쁘다. ‘나쁜 선교’다. 소신·검소는 좋고, 옹고집·인색은 나쁜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만큼 개종에 ‘관대한’ 나라도 없다. 기독교 신자에게 선교는 예수의 대위임령(大委任令· the Great Commission)에 따른 의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개종시키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역사적으로 불교 또한 선교 전통이 강한 종교다. 한국 불교도 국내외적으로 보다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서고 있다.



 나라 밖 사정은 다르다. 우선 개종에 부정적인 종교도 많다. 바리사이파 유대교를 비롯해 유대교는 한때 로마 인구의 10%를 차지한 적도 있다. 그러나 현대 유대교는 개종에 대해 부정적이다. 일부 정통파 유대교에서는 ‘개종을 희망하는 경우 세 번은 거절하라’는 원칙을 지킨다. 기독교의 도전이 있기 전까지 힌두교에는 개종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개종 절차 자체가 없다.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개종을 시도하는 것은 불교적이지 않다”며 개종에 반대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주류 기독교는 여러 선교 방법 중에서도 ‘본보기를 통한 선교(evangelism by example)’를 이상적으로 본다. 기독교를 믿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 발로 기독교를 믿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기독교 내에서 다른 교단 신자들을 자신의 교단으로 개종시키는 것도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가 정교회 신자들의 개종을 시도한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기독교 내 개종 시도를 반대한다. WCC는 다른 교회의 교리나 관습을 왜곡하거나 교육·의료·금융을 개종 시도를 위해 활용하는 행위에도 반대한다. 이런 생각들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추세다. 국제 기독교에서는 이미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때는 심사숙고해야 하며 교육·의료·금융상의 혜택을 ‘미끼’로 개종을 유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관점이 뿌리내린 교단이 많다.



 좋은 선교와 나쁜 선교를 구분하고, 선교 수단을 제한하는 것은 손발을 꽁꽁 묶어 놓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전통적인 선교 방법에 대한 반성은 국제사회에서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화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체벌 금지나 직장 내 성희롱 금지도 세계화의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는 선교의 영역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가 고려될 것을 요구한다.



 국내 수쿠크의 도입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도 개종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슬람은 모든 사람이 무슬림으로 태어나지만 부모·환경에 따라 다른 종교를 믿게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은 개종의 종교다. 국내 다른 종교에 위협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이슬람은 이미 한국의 종교다. 개종에 대한 세련된 이해와 이슬람도 이미 우리 종교 중 하나라는 인식에 국익과 종교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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