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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인생살이 ‘치수’

중앙일보 2011.03.01 00:25 종합 29면 지면보기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바둑은 18급부터 시작해 1급이 되고 그다음 1단부터 9단까지 이어진다. 실력 차이가 분명하다. 5급이 1급과 맞두어 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5급이 1급과 내기바둑을 두려면 4점을 접어야 한다. 이런 걸 ‘치수’라고 한다. 골프에도 핸디캡, 즉 ‘핸디’라는 게 있다. 만약 1급이 실력을 숨긴 채 5급과 내기바둑을 둬 큰돈을 땄다면 무슨 죄목에 해당할까. 사법당국은 도박죄가 아니라 사기죄로 처벌한다.



 가끔 IMF 사태 언저리에 우리나라 금융 실력은 몇 단이나 됐을까 상상해 본다. 서양의 고수들은 이창호·이세돌 수준인데 그들과 맞바둑을 두며 버틴 우리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가 돌반지까지 바쳐 가며 나라가 잃은 큰돈을 메웠지만 국제사법재판소가 그들 서양의 고수를 사기죄로 처벌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세계화, 특히 머니게임(money game)의 세계화는 고수들의 계략이란 생각마저 든다. 강자들끼리의 게임은 피곤하고 리스크도 크니 국경을 넘어 하수들의 세계에서 합법적으로 마음껏 놀아 보자는 얘기처럼 들린다.



 바둑이나 골프·당구 등은 치수가 확연하고 예술이나 스포츠·연예도 치수가 어느 정도 드러나지만 세상사의 대부분은 치수를 잴 수 없다. 기술·능력뿐 아니라 재능·돈·가문까지 넓히면 인생살이의 치수 규격화는 엄두도 낼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맞바둑’을 두고 그걸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문제는 세상이 점점 ‘게임화’돼 가는 데 있다. 세상살이가 비정한 승부의 논리를 닮아 가면서 강자들은 점점 신(神)이 돼 간다. 한국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일찌감치 결사항전을 시작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무서운 통찰력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입시도 선거도 결혼도 게임이 돼 간다. 리비아의 민주화도 승부 관점에서 본다.



 세상은 강자들의 얘기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정치·코미디·경영·축구·영업·요리·공부 등 새로 뜬 강자·스타들의 얘기로 가득하다. 그걸 보며 우리는 이를 악문다. 8급이 7급이나 6급이 된들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할 뿐이지만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하다 못해 성형이라도 하고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인간관계라는 게임의 몇 가지 하찮은(?) 수라도 익힌다. 애들만 게임 중독이 아니라 어른들도 게임 중독이다. 게임의 함정, 맞바둑의 함정이 세상을 광분케 한다. 그럴수록 세상은 고수의 놀이터요, 하수의 지옥이 된다.



 인생살이가 게임이 되려면, 즉 인생살이가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것이라면 ‘치수’가 있어야 공정하다. 치수가 없으면 법의 판단 그대로 ‘사기’가 된다. 따라서 치수를 잴 수 없는 인생살이는 게임이 될 수 없고 승패도 논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 사람 대부분은 별수 없이 하수나 중수에 속한다. 40평 아파트가 20평 아파트를 괄시하는 것,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끼리 헐뜯는 것, 한 수 위에 있다고 짓밟는 것은 하수들이 흔히 저지르는 서글픈 자살골이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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