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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카노사 굴욕

중앙일보 2011.03.01 00:21 종합 31면 지면보기








1077년 1월 신성로마제국(중세의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알프스산을 넘어 북(北)이탈리아 카노사 성(城)에 당도했다. 얼마 전 자신을 파문(破門)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였다. 교황은 그때 잠시 그 성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아 황제는 맨발에 내복 차림으로 사흘간 금식하며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교황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복권될 수 있었다. 중세 교권(敎權)이 속권(俗權)을 누른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사건이다.



 그전까지 교황과 왕은 공생관계였다. 교황은 기독교 세력의 확장을 위해 왕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대신 교회는 왕에게 성직자 임명권을 줬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전 교황들과는 사뭇 달랐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청빈과 금욕을 강조하며 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추진했다. 1075년 12월 그는 마침내 하인리히 4세의 주교직 서임권을 금지시켰다. 황제는 즉각 반격에 나서 교황을 폐위(廢位)시켰다. 교황도 ‘눈에는 눈’으로 나왔다. 황제를 파문했다. 싸움은 주교와 공작들이 교황 편에 서면서 황제의 패배로 끝났다. 카노사의 굴욕이 그 결과다. 둘의 반목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살아난 하인리히 4세는 3년 와신상담 끝에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 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아비뇽의 유수(幽囚)’ 1309~1377년은 왕권이 교권을 압도했다.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중세 유럽 역사는 정치와 종교가 엉키면서 부조리와 전쟁으로 점철됐다. 가톨릭이 국교였던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정교분리 원칙을 받아들였다. 영어 표현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는 1802년 토머스 제퍼슨이 처음 썼다고 한다. 이 정신은 그 뒤 미국 헌법에 반영되었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다른 나라에도 파급되었다.



 우리 헌법도 제20조 2항에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신교의 교황청쯤에 해당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여당 지도부에 이슬람채권법이 통과되면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협박했다. 며칠 뒤엔 존경받는다는 원로 목사가 대통령 하야 운동에 목숨을 걸겠다고 했다. 여당은 바로 겁먹고 법안 처리를 무기 연기했고, 대통령은 입도 뻥긋 못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판 카노사의 굴욕이 벌어지고 있다.



심상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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