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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시리즈를 마치며 (1) 회고록 통해 알려진 사실 8

중앙일보 2011.03.01 00:10 종합 10면 지면보기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의 전리품이었다

1952년 6월 전선에서 작전 중인 미군의 모습. 사진 전문지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이다.




1950년 10월 비밀리에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1. 6·25 전쟁의 적은 누구였나

김일성은 석 달 만에 갈팡질팡

국군이 상대한 적은 중공군이었다

#1. 6·25 전쟁은 국제전이었다=
‘김일성 군대의 남침→인천상륙작전과 북진→1·4 후퇴→휴전’ 정도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전쟁이 벌어진 실제 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3년 동안 벌어진 6·25는 초반 3개월을 북한군과 싸웠고, 나머지는 중공군과 벌인 싸움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6·25가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이 공산 측의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벌인 국제적 성격의 전쟁이란 점을 정확하게 적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이 직접 머물렀던 경무대를 파괴하지 않은 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 뒤 갈팡질팡했던 그의 행적도 자세히 적었다.



1948년 14연대 반란 진압에 나선 박정희(왼쪽)와 송호성.

#2. 박정희는 어떻게 살아났나

남로당 잡으러 직접 돌아다녔다고?

좌익 박정희 구명의 진상을 밝히다

#2. 박정희 구명, 육사8기 발탁 ‘5·16의 산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 군사책의 신분으로 사형을 받을 뻔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과정은 이미 일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박 전 대통령 구명의 주인공인 백 장군의 회고를 통해 자세한 사항들이 새로 알려지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이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얻어맞은 박 전 대통령이 남로당원을 색출하기 위해 요원들과 함께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식의 종래 서술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박 전 대통령은 명동의 증권거래소에 줄곧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백 장군에 의해 살아났다. 5·16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이 당시 백선엽 정보국장의 지시로 정보국에 뽑혀 박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고, 남로당 군사책 전력으로 진급이 누락될 뻔했던 박정희의 준장 및 소장 진급을 가능케 한 사람도 백 장군이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으나 박 전 대통령의 5·16 토대를 만들어 준 사람은 백 장군이다.



1952년 11월 빨치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여성.

#3. 빨치산 토벌전 진실은 무엇이었나

국군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고?

악의적 사실 왜곡 바로 잡았다

#3.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진실=
1948년 벌어진 여수와 순천의 국군 반란사건과 호남과 영남 일대의 빨치산 사건이 깊이 연결돼 있다는 점, 대한민국 안전을 크게 위협했던 빨치산들을 어떻게 토벌했는지 등이 상세하게 소개됐다. 국군이 당시 토벌에서 마구잡이로 인명을 살상했다는 식의 악의적인 사실 왜곡도 바로잡았다. 빨치산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쳐 경부선과 전라선을 장악할 경우 아군이 전략적으로 맞아야 할 최악의 상황에 대한 기술, 이를 위해 미8군 사령관이 3개 정규 사단으로 ‘백 야전전투사령부’를 구성해 백 장군에게 지휘를 맡긴 사실 등이 그려졌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작전에 나선 국군.

#4. 국군은 어떻게 단련됐는가

중공군만 뜨면 등 돌렸던 약골 군대

미군 정규전 빠르게 습득하며 성장

#4. 국군 현대화의 후원자 밴플리트=
허약한 군대, 쉽게 등을 보이는 군대, 정신력은 좋지만 잠시 싸우다가 힘에 부치면 물러서는 군대…. 전쟁 초반 국군이 보인 모습이자 평가다. 그러나 국군은 전쟁을 겪을수록 강해졌다. 적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빼앗긴 고지는 반드시 찾으려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그러나 그 바탕은 조직력과 화력, 물자 보급력이었다. 국군은 당시 155㎜ 야포로 상징되는 미군의 화력을 끌어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그들의 조직력과 보급능력, 작전 방식을 흡수했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국군 2군단에서 양성한 국군 포병이 강력한 야포 지원능력을 갖추면서 국군은 훨씬 강화된 전투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1951년 8월 강원도 홍천 전방부대 시찰에 나선 이승만.

#5. 이승만은 친미주의자였나

미국과 치열한 싸움 벌인 전략가

신생 대한민국의 성장 기초 닦아

#5. 이승만의 재평가=
건국과 북한의 남침을 받은 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와 민주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과정이 다른 어느 기록보다 상세하다. 미국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면서도 대한민국이 얻어낼 것은 충분히 얻어낸 노련한 정략가(政略家)로서의 그의 면모가 자세히 드러났다. 반공포로 석방에 이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이 자세하게 그려졌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신생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미국의 확실한 보장 없는 휴전에 반대하며 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의 대한 경제 지원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1952년 12월 방한한 아이젠하워(왼쪽)와 이승만.

#6. 미국은 ‘에버레디’ 왜 실행 못했나

아이젠하워, 직접 이승만 제거 승인

학계가 검증한 6·25의 특종비사

#6. 이승만 제거작전 ‘에버레디’의 비사=
‘상비계획(Ever ready operation)’이라고 불리던 이승만 대통령 제거 구상이다. 미 행정부와 군이 53년 4월 마련해 실행을 검토 중이었던 내용이다. 이 대통령은 휴전에 반대해 “ 대한민국 군대는 유엔군에서 탈퇴해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내비쳤다. 미국은 이에 따라 휴전의 최대 걸림돌로 떠오른 이 대통령 제거를 검토했다. 급기야 이 대통령이 미국과 유엔, 나아가 공산 측이 가장 반대해 온 한국 내 반공 성향의 적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자 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의 대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본지 연재에 대한 특별기고 형식으로 연세대 박명림 교수가 제공한 사실이다.



밴플리트, 콜린스, 클라크, 테일러 장군(왼쪽부터).

#7. 6·25의 미군은 맥아더뿐이었나

미국의 2차대전 영웅들 총집결

리지웨이, 밴플리트, 밀번 재조명

#7.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과 6·25=
지상군만 30만 명 이상을 파견한 미군의 지휘관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제임스 밴플리트, 프랭크 밀번, 맥스웰 테일러 등 세계 최강의 미군 지휘관들이 한반도에서 국군과 함께 작전을 벌였다. 최첨단의 군사 작전, 치밀한 시스템이 움직이는 미군의 부대 운용 방법 등이 국군에게 전해지는 계기였다. 백 장군은 그들과 가장 폭넓은 접점(接點)을 형성했던 인물이었다.



1952년 4월 위문공연을 관람 중인 국군.

#8. 국군, 어떻게 중공군 24만 명 꺾었나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의 야전지휘

국군, 금성 돌출부 전투 승리하다

#8. 금성 돌출부 전투의 실제 지휘관=
휴전을 코앞에 둔 53년 6월과 7월에 중공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국군 담당 지역을 골라 공격해 온 전투다. 정부 공식 간행 기록물에는 이 전투의 지휘관을 당시 2군단장이던 정일권 중장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전투를 이끈 주인공은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당시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던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긴급 요청으로 백 장군은 붕괴되고 있던 금성 돌출부 전선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군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던 테일러 사령관은 54년 40만 대군을 이끌고 휴전선을 단독으로 방어하는 한국군 최초의 야전군 사령관에 백 장군을 추천했다.

백선엽 장군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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