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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은 억지 중국인 … 후한서삼국지서 중국 성 ‘위’ 붙여

중앙일보 2011.02.28 10:30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대릉하의 랴오닝성 상류 부분. 강폭이 300~400m가 될 만큼 넓고 깊다. 이 강은 동이족의 나라 은(殷)이 BC 11세기께 중국 한족의 나라 주(周)에 의해 멸망한 뒤 은의 제후였던 기자가 만든 ‘기자의 나라’를 흘렀던 강이다. 고조선 땅이 된 이 대릉하 지역을 BC 3세기 중국 연나라가 침입해 장악하지만 고조선 만왕은 이 땅을 회복한다. [사진=권태균]

김운회의 新고대사 :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⑥위만의 정체성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천하를 통일한 은나라 탕 임금은 옛 성현들의 후손들이나 은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고죽 등의 나라에 봉했다(古聖賢有功者之後 封孤竹等國 各有差)”고 했다. 이 기록은 BC 1600년경의 일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기후의 고죽국이 은나라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은나라의 왕가와 가까운 제후국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 고죽국은 고조선의 역사와 그 영욕을 함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로인 까닭에 ‘고대 동북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정세변동에 따라 부침이 많았던 지역이다.



고조선은 BC 4세기 이후 보다 독자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인근 연나라와의 투쟁과 더불어 성장했다. 한때 연의 침공으로 요하 동쪽까지 밀렸지만 연의 멸망 후 진(秦)나라와 대치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BC 221~BC 206)은 내부 정비와 흉노의 위협 때문에 ‘멀고 지키기도 어려운’ 고조선까지 공격하지는 않았다. 진 멸망 뒤 한이 들어서자(BC 202) 과거 연나라 지역에서 BC 190년을 전후로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 (위)만이 문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조선왕 만(滿)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기일 때 진번과 조선을 복속하여 관리를 두고 장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의 외요(국경 밖의 땅)에 속했다. 한나라가 흥한 후 그곳이 멀고 지키기도 어려워 다시 요동의 요새를 수축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속하게 했다. 연나라왕 노관이 배반해 흉노에 들어가니 만이 망명하여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으고 퇴결만이(<9B4B>結蠻夷·오랑캐)의 모습으로 동으로 달아나… 여러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왕이 되었고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卷115 朝鮮列傳)고 했다. 이 기록은 큰 흐름은 보여주지만 구체적인 사실과 해석에서 문제투성이다.







우선 고조선이 연의 속국인 듯 기록돼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과 연의 갈등이 극심했던 점 ▶연나라 장수가 침입해 고조선이 후퇴한 기록이 분명한 점 ▶진 멸망기에도 고조선이 건재한 점 ▶만(滿)은 고조선으로 ‘망명’한 점 등은 고조선이 절대 속국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던 사마천이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중국 고대사 전문가인 이성규(서울대) 교수는 “사마천은 한나라 주변 국가는 대부분 중국인(漢族)이 건설했다고 한다. 남월(南越)은 진나라 관리 출신(南越列傳), 운남(雲南)의 전왕(<6EC7>王)은 초나라 장왕의 후손(西南夷列傳)이라는 식이다. 진한(辰韓:신라 전신)의 주민이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해 망명한 진나라의 후예라고 주장한 것도 동이 사회에 잡거한 중국인의 비중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라고 말한다.



‘만(滿)’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동안 이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가 연나라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 만이 나타나는 최초 기록인 사기에는 위(衛)라는 중국식 성이 붙지 않았다. 그냥 ‘만(滿)’이라고 썼다. 만의 복장도 전형적 동이의 모습이었다. 또 고조선의 준왕은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만큼 만을 신임했다. 만은 왕이 된 뒤 국호를 그대로 고조선(조선)으로 불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만의 정체성은 ‘(고)조선인’에 가깝다.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망(BC 226)시키고 위만이 이 지역을 떠나는 시기(BC 190년경) 이 지역은 북방인과 한족의 완충지대로 국적을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비유하자면 만주사변(1931)에서 해방(1945)까지 시기의 연변 조선족과 유사하다.



또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儉)”는 기록이다. 그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也)”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해설로 2세기 후반의 학자인 응소(應<52AD>)는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遼東險瀆 朝鮮王舊都”史記 卷115)이라고 한다. 창려는 과거의 고죽국 지역이므로 왕검은 현재 베이징 동부 지역이다. BC 2세기께 고조선은 연나라에 뺏긴 과거 고죽국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다만 그 시기는 한나라 장군인 번쾌와 주발의 대군이 이 지역을 평정(BC 195)하고 철수한 이후로 보인다.



고조선 왕 만(滿)이 왕검성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할 당시 한나라는 국내 사정이 매우 혼란했다. 사기에 따르면 BC 200년 태원(太原)을 지키던 한신(韓信)이 흉노에 항복하자 한 황제 유방(劉邦)은 32만 대군을 끌고 친정에 나섰지만 평성(현재의 다둥·大同)에서 포위되어 뇌물을 바쳐 겨우 탈출했고, 이후 엄청난 곡식과 비단·솜을 공물로 바쳐 흉노를 무마하였다. BC 199~196년 유방은 한신의 잔당과 진희(陳<8C68>) 등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분주했고, BC 195년은 연왕이었던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자 대군을 파견하여 진압한 후 고향인 패(장쑤성 펑샨)에서 쉬었다. 이후 흉노는 고조선과 함께 만리장성 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만(滿)의 고조선’은 고조선이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후의 사서는 ‘위만 조선’이라 해서 고조선과 분리시킨다. 문제는 사기보다 300~400년 늦게 쓰여진 삼국지 후한서 등에서 비롯됐다.



삼국지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북상투에 오랑캐 옷을 입고 다시 와 기자를 대신하여 그들의 왕 노릇을 하였다”(“燕人衛滿, <9B4B>結夷服, 復來王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하고, 후한서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피했다”(“燕人衛滿避地朝鮮” 東夷列傳 第75)고 썼다. 그동안 ‘만(滿)’으로만 알려진 이름에 당시 동북에 흔한 중국 성(姓)인 ‘위(衛)’를 붙여 위만(衛滿)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를 왜곡한 중화주의 사서의 영향으로 이후 ‘위만의 조선’이란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삼국지는 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후 준(準)은 시종들과 궁녀들을 데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 땅(한반도 남부)으로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다. 그 후 왕계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한 땅의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三國志‘魏書’ 東夷傳 韓)라고 하여 중국인 위만의 고조선과 원래의 고조선을 분리하기 위해 이전의 ‘고조선 왕조가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후 나타나는 고조선(만조선)의 정체성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한나라와의 투쟁도 더욱 심화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나온 ‘왕검에 도읍’이라는 기사로 보면, 고조선은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BC 2세기 초반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역이었던 고죽국 지역을 점령해 왕검성을 건설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이에 따라 고조선과 한나라의 갈등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을 대부분 장악했고 고조선은 한나라와 흉노의 완충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이런 지정학적 요소를 이용해 한과는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흉노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 “흉노의 좌현왕과 그 장수들은 주로 동방에 살고 있는데 예맥과 조선에 접하고 있다”(史記 匈奴列傳)는 기록은 흉노의 구체적인 위치, 조선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준다. ‘흉노가 조선과 예맥에 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던 동호·선비·오환·숙신 등은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며 중국이 흉노라 부르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한서에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東伐朝鮮 起玄<83DF> 樂浪 以斷匈奴之左臂” 漢書 卷73 韋賢傳)고 한다.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 왕 만(滿)이 중국인이라면 고조선은 흉노보다는 한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겠지만 고조선은 오히려 흉노와 더 가까웠다. 바로 이 점에서도 만(滿)은 중국인일 수가 없다.

BC 2세기는 고조선이 저력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춘추 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이 멸망해 사라졌지만 고조선만은 의연히 존재하면서 한나라와 흉노의 세력관계를 적절히 이용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해 거의 한 세기를 번영했다. 그러나 기회만 노리던 한나라는 BC 129~119년 북방을 공격했고 흉노세력이 약화되자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침공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한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던 고조선은 BC 108년 결국 한(漢)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고조선과 한의 전쟁기록은 고조선의 전쟁수행 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사기에 한나라가 육·해군을 동원해 1년 동안 공격하였으나 자중지란으로 계속 실패하자 ‘한족의 전매특허’인 이간계(離間計)로 조선을 정벌했다고 나온다. 조선을 한나라에 팔아넘긴 5대 매국노(임신5적)들인 참(參), 한음(韓陰), 왕겹(王<550A>), 장(長), 최(最) 등은 한나라의 작은 제후로 봉해졌다. 참은 홰청후(<6F85>淸侯), 한음은 적저후(狄<82F4>侯), 왕겹은 평주후(平州侯), 장은 기후(幾侯), 최는 온양후(溫陽侯)가 됐다.



이들 봉지가 대부분 고죽국이나 왕검성에 가까운 곳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위소(韋昭) 등의 주장을 인용해 “홰청과 온양은 제(산동반도), 적저는 발해(渤海), 평주는 양부(梁父), 기는 하동(河東)”이라고 했다. 이들 봉지가 고조선 땅이란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봉지는 자신이 속한 곳의 땅인 경우가 있기 때문에 5개 봉토의 분포는 고조선 영역이 일부는 산동 북부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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