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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3·1운동의 이면

중앙일보 2011.02.28 00:23 종합 33면 지면보기








3·1 운동 주도 인물들은 천도교 대표 손병희(孫秉熙)와 기독교 대표 이승훈(李昇薰)을 제외하면 그다지 명망이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舊) 대한제국의 명사들을 끌어모아 대표성을 높이려 했는데,의외의 인물도 적지 않았다.



 『의암(義菴) 손병희 선생 전기(1967)』에는 박영효(朴泳孝)·한규설(韓圭卨)·윤치호(尹致昊)·윤용구(尹用求)·김윤식(金允植) 등이 그 대상이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 1910년 10월 12일)』에 따르면 일제는 1910년 10월 대한제국의 멸망에 공을 세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는데, 철종의 사위 박영효와 한규설·김윤식·윤용구는 여기 포함된 수작자(授爵者)들이었다. 합방에 반대했던 참정(參政)대신 한규설과 윤두수(尹斗壽)의 후손 윤용구는 작위를 거부했으나 박영효와 김윤식은 아니었다. 수작자(授爵者)를 가담시키는 것도 의의가 있다는 뜻에서 박영효와 김윤식도 포함시켰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崔南善)과 송진우(宋鎭禹)·최린(崔麟) 등이 설득에 나섰는데,한규설은 당초 “창덕궁 대궐 앞에서 자결하자면 따르겠으나 민족 자결은 모르겠다”고 유보적 태도를 취하다가 윤용구의 거절 소식을 듣고 거부하는 등 모두 거부했다. 손병희는 심지어 이완용(李完用)까지 끌어들이려 했다고 회상했다. 측근들이 독립운동 모독이고, 비밀누설 염려가 있다고 말리자 손병희는 “매국적(賣國賊)까지 독립을 원한다면 삼천만이 다 독립을 원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라면서 “매국적이지만 일인(日人)에게 누설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접촉했다. 이완용의 조카뻘 되는 천도교도 이회구(李會九)를 대동하고 찾아온 손병희에게 이완용은 “이제 새삼스레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 없다”면서 “이번 운동이 성공하면 나는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인데, 그렇게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일인에게 누설하지는 않았다고 손병희는 회고했다.



 이완용은 사실 독립협회 초대 회장에다 명필이었고 친러파였다. 주역(周易)에도 통달했던 이완용은 3·1 운동의 실패를 미리 읽고 이로써 독립의기가 꺾일 것이라고 예상해 일인에게 누설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반면 같은 수작자였던 김가진(金嘉鎭)은 전협(全協)의 제의를 받아들여 대동단(大同團) 총재로 취임하고 1919년 10월 10일 신의주를 거쳐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함으로써 73세에 임정고문으로 독립운동가의 새 삶을 시작하는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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