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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내 은퇴를 믿지 않을거요, 외국으로 갑시다”

중앙선데이 2011.02.27 02:09 207호 8면 지면보기
정계를 떠난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가 1993년 1월 26일 영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김포공항에서 열린 환송식에 참석해 꽃다발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장성민 전 의원 인간 金大中이야기<2>
드골과 카터의 방식으로 정계복귀를 준비하자는 보고서를 제출한 다음 날인 1992년 12월 22일이었다. DJ와 이희호 여사가 무주구천동으로 나들이를 했다. 대선 패배 후 처음으로 집밖에 나선 것이다. 혼자 동교동에 남아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무엇보다 DJ가 다시 신문을 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겐 신문을 읽는 행위가 바로 정치의 시작을 의미했다.

고향 하의도 대신 영국으로 간 DJ


평소 알고 지내던 모 신문사 사진기자 J에게 전화를 걸어 “특종을 주겠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기자들은 특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숨져간 기자들이 좀 많은가.

12월 24일 오전 2박3일간 무주구천동에 갔던 두 분 내외가 돌아왔다. 대문을 열자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DJ가 천천히 들어왔다. 그 순간 약 3m쯤 떨어진 아름드리 정원수 소나무 뒤에 숨어있던 사진기자가 몰래 셔터를 눌렀다. 나는 혹시 DJ나 이 여사가 눈치챌까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두 분 다 별 생각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이 사진이 조간신문 1면에 크게 실렸다. 그동안 동교동에 대해 가장 비우호적이던 바로 그 신문에 난 것이다. 그때까지도 DJ는 신문을 보지 않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총재님 사진이 신문에 크게 실렸습니다.” DJ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그게 어떻게 실렸지? 자네가 내가 오는 시간을 알려줬나?” “그게 아니고요, 기자가 대문을 열었을 때 슬쩍 들어와서 소나무 뒤에서 사진을 찍고 빠져 나간 것 같습니다.” 미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사진 기자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나. 뻔한 얘기지만 DJ는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별로 싫은 표정도 아니었다. 점심 무렵 DJ가 다시 물었다. “아까 그 신문 엇따 뒀나” “예, 서재에 갖다 놓았는데요.”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DJ가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정계은퇴 선언 후 무주구천동에 첫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DJ. 1992년 12월 25일자 신문 1면에 이사진이 나오자 DJ는 깜짝 놀랐다.
그 다음날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DJ가 물었다. “전 국민이 나에게 동정과 아쉬움을 보낸다고 했는데 그게 자네 생각인가, 아니면 국민들이 정말 그런가?” 지하 서재에 있는 회의용 4각 테이블 위에 모아 둔 신문들을 죽 펼쳐놓았다. DJ는 제목들을 대충 훑어봤다. 자세히 읽지는 않고 대충 넘기면서 오피니언 페이지로 가 칼럼들의 제목을 살폈다. 관심이 가는 기사에 대해선 슬쩍 물었다.
“이 사람은 뭐라고 썼어요?” “네, 총재님의 정계은퇴가 역시 거목다운 결정이라고 그렇게 썼습니다.” “그래요?”

어차피 DJ는 정치와 떨어져 살 수 없었다. 그의 평생의 삶 자체가 정치였다. 세 번째의 대선패배로 어쩔 수 없이 정치포기를 선언했지만 물고기가 어떻게 물을 떠나 산다는 말인가. 그날 이후 나는 훨씬 맘 편하게 보고를 할 수 있었다.

정계복귀 의사가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서울을 떠나야 했다. 어느 나라나 수도는 정치도시
(political city)다.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라는, 국가를 움직이는 핵심 파워가 모두 모여 있는 장소다. DJ가 정계은퇴를 했다는 걸 국민에게 분명히 각인시키려면 서울에 있으면 안 됐다. 확실하게 정치를 그만뒀고, 은퇴했다는 메시지가 국민에게 전달돼야 비로소 정치 재개의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역설적 상황이었다.

처음엔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가는 걸 검토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김영삼(YS)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의도로 가면 기자들이 찾아오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DJ에 대한 보도가 나가면 YS는 그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게 뻔했다. 현직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으로 DJ 주변 사람이든, 정치자금이든, 뭐든 비틀어서 공격할 게 분명했다. 이런 분석에 대해 DJ도 같은 생각이었다. “맞아요, YS는 내가 은퇴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결론은 자연스레 내려졌다.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DJ는 미국으로 가고 싶어했다. 전두환 정권 때 망명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데다, 미국 언론이 우호적이고, 수많은 재미 동포도 정치 재기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완곡히 반대했다. 그건 국민의 눈에서 사라져 ‘DJ 향수’를 불러일으키자는 당초 계획을 수포로 돌리는 것이었다.

“총재님,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언론과는 만나지 말고 정치 코멘트도 하시면 안 됩니다. 정계 복귀 얘기가 찔끔찔끔 나오면 총재님에 대한 그리움을 지지로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완전히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고 신비화해야 합니다. 미국에 가면 노출됩니다. 차라리 영국은 어떠십니까.”

DJ도 그 부분은 수긍했다. 하지만 옥스퍼드 대학으로 가고 싶어 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파키스탄의 야당 지도자 베나지르 부토가 나온, 정치가 강한 대학이다. 정치 그 자체인 DJ가 관심을 둘 만한 대학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옥스퍼드 역시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대안으로 제시된 게 런던에서 승용차로 5시간 정도 떨어진, 온통 숲에 둘러싸인 케임브리지 대학이었다. DJ는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경희대 부총장이던 라종일씨를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실무작업은 라 부총장의 제자이자 DJ의 외신담당 특보였던 김상우 전 의원이 맡았다. 1993년 1월 26일 DJ가 영국으로 떠났다. 대선 패배 38일 만이었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출국이었다. 당시 과정에 대해선 김대중 자서전 1권 611쪽에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내가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가 영국으로 바꾼 것은 조금이라도 더 국내 정치와 떨어져 있으려 함이었다. 미국은 아무래도 현실 정치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외국어가 영어라는 것도 고려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캠퍼스 도시이고 자연 경관이 빼어나다는 것도 관심을 끌었다. 물론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남궁진·최재승·홍사덕 의원과 둘째 홍업이랑 영국 땅을 밟았다. 미리 출국했던 아내와 김옥두 의원, 박금옥 비서가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이렇게 나의 영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동교동에 혼자 남았다. 날마다 북한과 국내 정치 상황을 분석해 보고자료를 준비하는 게 일과였다.
DJ 없는 동교동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막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럴수록 DJ의 정계복귀는 물 건너가는 것 같았다. 지지자들에겐 그처럼 가슴 아픈 일도 없었다. 낙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3월 11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느닷없이 동교동으로 TK(대구·경북)의 대부 격이자 YS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한 허주(虛舟) 김윤환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당시 동교동 전화는 100% 도청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동교동 식구들은 중요한 얘기는 절대로 전화로 하지 않았다. 허주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전화에다 “김 후보님에게 꼭 전할 말이 있어 장 비서를 봐야겠다”고 말했다. 자기가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클럽 회원권이 있어 거기서 운동을 하니 끝나고 보자고 했다.

다음 날 오전 11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허주가 다짜고짜 말했다. “국민들이 김 후보님을 그냥 두진 않을 겁니더.” 강하지만 친근감을 주는 경상도 사투리였다. “무슨 말씀이시죠?” “이게 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문제란 말입니다. 난 YS가 (대통령을) 했으니 그 다음엔 김대중 후보님도 꼭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니가, 이런 생각입니다.” “저희 총재님은 이미 정치를 떠났는데요.” “그게 아이고, 내가 영국 왕실에서 주는 올해의 정치인상을 받으러 영국에 갑니더. 간 김에 김 후보님을 뵙고 싶다 이겁니더. 거기까지 가서 안 찾아뵙고 오는 것도 예의가 아이고, 이 김윤환이가 한번 뵙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꼭 연결시켜 주십시오. 만나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더.”

당시 정치 상황은 YS가 공직자 재산공개를 밀어붙이면서 TK 출신들이 대다수인 구(舊)민정계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집권 1등 공신인 허주도 YS 정부의 논공행상에서 제외돼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허주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DJ를 지렛대로 YS를 견제하겠다는 뜻이었다. 영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총재님, 도청되는 줄 알지만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니, 중요한 거면 들어와서 하지 그래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허주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DJ는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장 동지는 어떻게 생각해요.” “만나봐야 별 이득이 없을 것 같은데요. 괜히 YS만 자극하게 되고, 총재님 정계복귀 소문만 키울 것 같습니다. 허주가 총재님을 이용하려는 거 같습니다.” “맞는 얘기예요. 감사하지만 지금은 만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는 내 뜻을 전하세요.”

하지만 허주는 “그럼 영국 내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며 완강했다. 허주는 3월 18일 출국했다. 영국에 가서 DJ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얘길 나중에 들었다. 하지만 DJ가 완곡히 거절해 결국 그 회동은 무산됐다. YS정부가 시작됐지만 허주는 거의 한 달 동안을 영국과 프랑스·하와이·일본 등을 돌다 뒤늦게 귀국했다. 재산공개를 계기로 YS의 서슬 퍼런 사정(司正)이 시작됐다.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신권력의 구권력 밀어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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